‘여호와 호칭’과 잠언의 주권성 (4)
<지난 호에 이어서>
2. 잠언의 통일 구조에 계시된 주권성
4) 직관적 판단의 지식: 주권성의 실제
절대주권적 섭리 방식으로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는 이스라엘 역사 섭리에 바탕을 두고 주권성을 찬양하게 하신다. 이는 인류 시조 아담에게 세우신 삼대언약을 메시아를 통해 실체적으로 성취하실 것을 확증하는 역사를 통해 계시된다. 그리고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방법은 전적으로 신적 주권에 의한다. 이를테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왕 말년에 아도니야가 왕위에 오르려는 반역이 발생하게 하신다. 얼핏 보면 다윗 왕가를 보호하는 데는 부정적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과 보호가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적 통치에 의존하며 이로써 여호와의 주권성을 깨닫게 하는 데는 부정적 사건일 수가 없다. 솔로몬이 다윗 왕가를 계승하여 이스라엘 통치자가 되고 그 나라를 형통하게 다스리게 하신 역사(왕상 1:5∼53)는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대로 섭리하신 것(대상 22:9∼10)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왕위 계승을 이어가게 하시는 여호와의 섭리 방법 즉 주권성을 통해 계시 되는 여호와의 존재와 사역과 속성의 영광 선포를 깨닫는 것이다. 솔로몬 이후 유다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전체가 솔로몬 신복 여로보암의 손에 넘어가는 역사도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하게 하는 역사 섭리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국가 체제를 건립하고 보호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적 섭리는 인간 중심적 판단에서 벗어나 있으며 예측하거나 예단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여호와의 언약 성취의 결과인 국가 체제의 운영은 한순간도 여호와의 통치 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역사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여호와의 주권성 찬양이 추상적인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든 역사적 사실에서 확증되는 실제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성경신학 주창자 박용기는 잠언에서 말하는 신적 지식에 대해 “총체적인 만사만물에 대한 부분적 경험에 의한 직관적(直觀的) 인식의 결과”(박용기, 『성경강론8』, 4102.)라고 정의한다. 직관적 인식은 여호와의 절대 주권적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약속하신 나라를 세워서 통치하게 하는 과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국가 통치에 대한 상세한 훈계를 해 주신다. 국가 수립 초기 단계부터 드러난 여호와의 주권적 섭리 과정에 대해 상세한 지식으로 훈계를 통해 가르쳐 주신다. 창세전 여호와의 선과 악을 아는 지혜로부터 시작해 창조와 종말을 볼 수 있는 명철 그리고 직관적 지식은 국가의 현실에 대해 통치자 중심으로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근신(謹愼)’하게 한다. 직관적 지식을 통해 여호와는 입술을 열고 닫는 세세한 통치 행위를 섭리하신다. 그래서 왕에게 필요한 국가 운영을 위한 모략과 지략은 다름 아닌 어떤 기술이 아니라 여호와의 법을 준수하고 여호와의 절대주권적 통치를 항상 기억하는 것이라고 한다. 재물과 영토에 대한 탐욕을 삼가게 하는 직관적 지식은 여호와의 주권적 통치가 추상적 가설이 아니라 현실 정치의 실제임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아첨하는 간사한 관리들을 순간 분별할 수 있는 것도, 자식을 비정하게 채찍질하는 것도 직관적 지식에 의한 훈계임을 깨닫게 하신다. 죄인의 형통, 술 취함, 탐식을 멀리하는 것도 통치자의 도덕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배운 진리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주권성 찬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잠언의 후반으로 향하면서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함께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여호와의 주권성이 국가 통치를 통해 얼마나 치밀하고 상세하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확증해 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가령 멸망 당할 자를 구원하라는 말씀이나 악인의 멸망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말씀(잠 24:11-22)은 주권성의 무게 중심이 인간 통치자에게 있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대적을 죽이는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판단력은 창세전 선과 악을 정하신 대로 계시하는 신적 직관력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짓 증인이 되지 말거나 자신이 원수에게 보복하여 갚지 말라는 말씀도 직관적 지식의 결과이므로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하는 지름길이 된다. 이렇게 통치자의 기술에 대해 상세하게 경계하는 것(잠 25:-27:)을 보면 여호와의 주권성은 얼마나 실제적인 방식으로 계시 되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가령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는 말씀도 직관적 판단력에 의한 여호와 경외의 지식이 얼마나 치밀하고 철두철미하게 국가 통치에 영향을 미치고 그 나라를 형통하게 하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친구의 충성스러운 책망과 원수의 배신적 입맞춤을 분별하는 능력도 직관적 지식을 통해 여호와의 주권성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보면 잠언 마지막에 언급하는 ‘국가의 형통’(잠 28:-31:)은 여호와의 주권성에 대한 실제를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매 순간 여호와의 국가 통치에 나타난 주권성을 찬양할 수 있도록 창조주와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세밀한 지식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명철과 지식을 얻게 한 의로운 통치자는 여호와의 율법과 율례를 준수할 수밖에 없다. 백성에게 과중한 세금이나 이자를 부과하는 것보다 여호와의 공의가 무엇인지 우선 판단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직관적 판단을 통해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과 포학을 행하는 치리자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악한 자가 파 놓은 함정을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 지혜롭고 의로운 왕의 통치는 국가 통치가 일어나는 매 순간마다 만사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구체적 지식에 의존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라고 할 때, 이는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하게 하는 구체적 지식이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묵시 곧 직관적 판단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잠언의 마지막에 구체적인 이름 ‘아굴’과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훈계를 거론하고 있다. 이 또한 아굴과 왕의 어머니를 찬양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역사적 실제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주권성을 세세하게 계시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직관적 지식을 반드시 주셔야 하며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아굴은 자신의 본성은 짐승처럼 총명과 지혜가 없어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이 없음을 고백하는 데서 경고와 훈계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굴이라는 구체적 인물의 자기 무지와 무능에 대한 고백은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하는 주체가 인간의 본성적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우선 보여준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구체적인 지식을 전한다. 왕의 힘을 멸망으로 치닫게 하는 여자에게 쏟지 말라고 경고로서 훈계한다. 포도주와 독주를 삼갈 것을 경고하며, 벙어리와 고독한 자 그리고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공의로 재판하라고 훈계한다. 여인의 현명함이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하다고 하며 이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동력이 된다고 일러준다. 장사꾼들과 거래할 때도 여호와의 지혜에 의존하고 인애의 법으로 성실하게 임할 것을 당부한다. 이처럼 앞의 아굴과 왕의 어머니의 훈계가 등장하는 것은 국가 통치를 위한 특별한 기술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언약대로 나라를 건립하시는 여호와가 자신의 주권성을 찬양할 수 있도록 올바른 직관력으로 적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식을 주셔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박용기, 『성경강론8-9』, 4323-4418. 참조)
이상에서 우리는 잠언의 통일 구조에 계시된 여호와의 주권성이 어떻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이를 어떻게 주관하시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여호와의 주권성 찬양의 원리로서 지혜와 명철, 지식과 훈계의 중요성을 논의했다. 그리고 창세전 여호와가 정하신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주권성 찬양의 원천임을 알아보았고, 창조와 종말을 통찰할 수 있는 명철이 주권성 찬양을 가능하게 하는 원칙임을 서술했다. 그리고 만사만물을 대하는 순간마다 여호와는 주권성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나님 기준의 선악 판단을 직관할 수 있는 지식을 주신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경험적 삶에서 생생하게 드러나는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하게 하는 주권성의 실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