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디카이오쉬네는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포괄하는가
“상상력의 전환”(The Conversion of the Imagination, Richard Hays, 큐티엠, 2020)의 번역자 김태훈 목사는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를 모두 “의”라고 번역하였는데 책의 저자 헤이스가 의와 정의를 동일시하여 두 용어를 서로 번갈아 사용하고 있으므로 독자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책의 부제가 “구약성경의 해석자 바울”이기에 헤이스는 구약에서 사용된 쩨다카와 미쉬파트 두 단어의 궁극적 의미가 같다고 본 것이다. 성구 사전에서도 “공의 또는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 쩨다카, 헬라어는 디카이오쉬네 등이다”라고 하면서 미쉬파트는 재판의 태도, 옳음, 공평한 것 등을, 쩨다카는 의로움, 경건, 덕을 뜻하며, 디카이오쉬네는 넓은 의미의 올바름, 생각이나 뜻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하는 사람을 말할 때 쓰이며 좁게는 정의, 공평을 나타낼 때 쓰인다고 풀이하고 있다. 정확한 의미와 관련해서 다양한 제안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도 또한 다양하다.
위와 같은 입장은 그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던 미쉬파트(מִשְׁפָּט), 쩨다카(צדק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υνη)의 관계를 다시 한번 검토하게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요약해 본다.
유대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1907-1972)은 “예언자들”(The Prophets, 삼인, 2017)에서 미쉬파트와 쩨다카 두 단어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쉬파트(정의, justice)는 소펫(재판관)이 선과 악을 분간하여 내린 판결을 뜻하는데 행동의 양태를 의미하고 쩨다카(righteousness)는 인격의 질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또한 의(righteousness)는 정의(justice)를 넘어서는데, 정의는 곧고 정확하며 각 사람에게 그 몫을 주는 것으로 박애, 친절, 관용을 내포한다. 정의는 법적인 것일 수 있지만, 의는 억압받는 자에 대한 애타는 동정과 연결되어 있다. 정의는 언제나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자비로 기울었으며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하심과 불쌍히 여기심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정의를 향한 관심은 사랑의 행위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가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쩨다카)와 정의(미쉬파트)를 행하게 하려 했다는 창세기 18장 19절 말씀에서 쩨다카와 미쉬파트는 디카이오쉬네의 서로 다른 측면을 의미하고 있다고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신학자 조너선색스(1948-2020)가 “차이와 존중”(Dignity of Difference: 말글빛냄, 2007))에서 강조하고 있다. 특히 쩨다카는 자선과 정의의 개념이 결합되어 있어서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자선 행위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지만 정의로운 행위는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쩨다카가 이처럼 묘한 단어여서 히브리어의 다양한 용례와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표현을 영어로는 할 수 없는 단어라고 한다.
김창락 교수는 “성경원문연구 제30호(2012.4)”에서 미쉬파트와 쩨다카가 병행절에 사용된 경우가 구약에서 57회나 되는데 여기서 두 단어는 각각 별개의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낱말이 아니라 두 낱말이 하나의 의미를 나타내는 이사일의(二詞一意, hendiadys)의 표현법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적 병행절이 아니라 반복적 부연적 병행절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랍비들은 성경에 70개의 얼굴이 있다고 한다. 70개의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상응하는 단어의 완전한 동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쩨다카란 단어를 KJV에서는 일관되게 righteousness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라틴어나 스페인어 성경에서는 같은 단어를 한결같이 justice라고 번역하고 있다. 반대로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70인역에서는 크리마(판단:κrιμα)와 디카이오쉬네로 변역한다. “글을 번역할 때는 단어보다 글쓴이의 마음에 공감하여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필립스 성경의 번역자 J. B. 필립스(1906-1982)의 말처럼 언어란 일관성의 덫에 갇히는 일을 거부하고 번역할 당시의 상황과 읽을 사람들의 환경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쩨다카와 같은 특정 단어의 가장 본래적이며 정확한 의미와 관련하여 다양한 제안을 제시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구약에서 의의 개념은 처음에 인정된 가치 기준에 부합된다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졌지만 모세 시대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뜻인 공의와 그 공의로부터 결과되는 활동들을 구분한다. 그 후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하여 공의는 도덕 행위에 대한 징벌로 묘사되다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의 성격을 띄게 된다. 즉,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은 공의를 행하기 때문에 구원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구약에서 의의 개념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천한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윤리적 관계, 구속적 관계, 전가된 의의 단계를 뛰어 넘어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다. 단죄하고 심판하고 고발하고 처단하는 의가 진보하여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의라고 제시할 때 그 디카이오쉬네 안에는 미쉬파트와 쩨다카가 있는 것이다.
월터스토프(1932- )는 “하나님의 정의”에서 영어 번역본들이 팔복에 나오는 디카이오쉬네를 righteousness(의로움)으로 번역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right(올바름)으로 번역한 예루살렘 성경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 지적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에서 몰트만(1926- )은 하나님의 정의가 단순히 선과 악을 판정하는 정의나 선한 업적을 보상하고 악한 업적을 징벌하는 정의이기보다는, 오히려 희생자에게 공의를 세우시고 가해자를 바로잡으시는 창조적인 정의라고 말한다.
3가지 용어를 그림으로 이해하면 쉽게 상상이 된다. 원 A와 원 B가 상당 부분 겹쳐져 있는 가운데 원 C가 A, B 두 원을 크게 감싸고 있는 그림을 그려보면 3가지 용어의 관계성이 나타나는 그림이 된다. 즉, 두 작은 원 미쉬파트와 쩨다카가 상당 부분 서로 중첩되어 있는 가운데 큰 원 디카이오쉬네가 두 원을 품고 있는 도형을 그려보며 3가지 용어를 생각하면 된다. 디카이오쉬네가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포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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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여인갑 장로 (지구촌교회 / (주) 시스코프 대표이사·경영학 박사) |
국가의 질서를 세운 칼빈_ 43 |
교회 음악을 개혁한 칼빈_ 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