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6-03-10 09:5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칼빈의 주권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2)


1) 지식의 두 축: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명제로 시작하다. 이는 신지식(神知識)과 인간 지식이 서로 병립되어 있다는 통찰을 제공하지만, 이러한 병립적 구조는 시작부터 진리 인식의 본질과 관련하여 심각한 논리적 난제를 야기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주관자를 하나님 자신으로 상정하고, 그 절대적 주권에 의한 계시의 결과로써 인간 지식이 도출된다는 선명한 방향성을 확립하지 못함으로써, 칼빈은 이후의 논의에서 인본주의적 인식론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결함을 노출하고 있다. 칼빈은 이 두 지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智),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17:28)하고 있는바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John Calvin, 『기독교 강요 上』, 김종흠,신윤복,이종성,한철하 공역(서울: 생명의말씀사 1991), 78-79; 이하 기독교 강요]

여기서 칼빈은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확정하지 못한 채, 인간이 하나님을 ‘응시’해야만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인식론적 순환론에 봉착하게 만든다. 순환론은 긍정적으로 보면 상호보완일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주장의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말도 된다. 하나님 지식이 우선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인식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탐구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전제를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환론은 궁극적으로 신지식 추구의 실질적 동력을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나 의지적 결단에 두게 되는 인본주의적 함정을 파놓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 자신에 관한 지식의 우선순위를 알기 어렵다는 칼빈의 주장은 칼빈 신학의 근본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그래서 칼빈이 극복하지 못하고 남겨둔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의 관계는 반드시 선명하게 규명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창세기 3장 22절의 기록처럼, 선악의 기준을 자기중심적으로 세워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전적으로 부패하여 어두워진 인간의 이성이 어떻게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스스로 ‘응시’하여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 바울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증거했듯이, 타락한 피조물에게는 신지식을 능동적으로 생성할 주체적 능력이 전무하다. 그런데도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실질적인 동기를 인간의 ‘빈곤함’과 ‘비참함’에서 찾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잘 드러내 준다. 특별히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그 비참한 파멸은 우리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굶주림과 배고픔 때문에 우리의 결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공포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된다. (.....) 한편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된다.(John Calvin, 『기독교 강요 上』, 78-79)

칼빈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동기는 자신의 파멸과 비참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진리 인식의 주체를 여전히 ‘인간의 반응’과 ‘의지적 선택’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인본주의적 성향을 지닌다.

첫째, 인간의 비참함을 신지식의 통로로 삼는 것은 일반 종교의 ‘기복적 동기’나 ‘자연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을 선포하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전적 타락이 아니며 인간에게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사로운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논리가 된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반드시 하나님을 찾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인식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없음을 증명한다.

둘째, 신지식의 주체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말씀하셨다. 즉, 위를 바라보게 되는 ‘시선의 전환’조차 인간의 결정에 의한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창세전 작정하신 뜻에 따라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주권적 견인 사역이다. 칼빈이 말하는 ‘비참함에 의한 자극’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지,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식론적 원인이 될 수 없다.

셋째, 참된 하나님 지식은 오직 ‘성령의 열매’로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극심한 공포와 결함 속에 있을지라도, 성령의 내적 조명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여호와의 존재를 확증하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는 말씀처럼, 신지식은 인간이 자신의 불행을 재료 삼아 도출해 내는 지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은총의 산물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응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계시’와 ‘은혜’에서만 출발해야 한다. 칼빈 역시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John Calvin, 『기독교 강요 上』, 79)라고 언급하며 신적 인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는 이 명제를 신학 체계의 유일하고도 확고한 대전제로 삼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응시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군더더기를 덧붙임으로써 여호와의 주권성에 대한 심각한 논리적 혼선을 초래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시를 ‘불행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함으로써, 여호와의 절대적 주권 사역을 인간의 심리적 기제 안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지식은 인간의 빈곤함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시기 위해 성령을 통해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신학의 출발점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가 아니라, 만사를 작정하시고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절대주권적 섭리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결국 칼빈이 신지식과 인간 지식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한 채 방황한 것은, 신적 주권성을 인간의 인식 체계 안으로 끌어들여 제한하려 했던 개혁파 신학의 내재적 한계를 보여준다. 여호와 계시중심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인간의 자기 이해를 신지식의 바탕으로 삼지 않는다. 오직 창세전 작정하신 뜻에 따라 만사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성경의 논리적 통일성 안에서 확증할 때만, 비로소 피조물인 인간의 본질과 위치도 정확히 규명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의 대전제는 인간의 의지적 응시가 아니라, 언약하시고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절대주권적 자기 선포여야만 한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한경진 목사 (산수서광교회 / 광주 성경신학학술)

칼빈의 주권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