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강해설교의 왕, 칼빈_34
칼빈은 강해설교의 왕이다. 칼빈은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 이후 천년만에 나타난 가장 유능하고, 가장 건전하고, 가장 분명한 강해설교자였다. 그 당시는 다른 종교 개혁자들도 설교에 있어서 비슷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성경에 대한 직접적 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관심이 컸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자연스럽게 칼빈의 건전한 해석과 연속적 강해설교는 위대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는 교부들의 강해설교보다는 훨씬 질서정연했다. 어떤 의미에 서 종교개혁은 곧 강해설교의 부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칼빈의 강해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대 종교개혁의 쌍벽이었던 마틴 루터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한 강해설교
마틴 루터는 어깨가 딱 벌어지고 얼굴이 넓고 솔직한 독일인이요, 활력이 넘치는 건강을 소유했었다. 그러나 요한 칼빈은 창백한 얼굴의 자그마한 불란서 사람으로 턱이 좁고, 체격이 가날프며 연구 생활과 병약으로 몸이 굽어 있었다. 루터는 그 많은 지식에다 감수성, 상상력이 풍부했고, 불같은 열정의 사람이었다. 또 루터는 유머가 넘치고, 음악, 어린이, 애완동물을 사랑하였고 자연과 함께 시적인 교향곡을 즐겼다. 그러나 칼빈은 유머가 별로 없었다. 칼빈의 편지를 보면 칼빈은 한없이 다정다감했으나 그의 공적 생활에는 지성과 의지만이 가득 찼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는 양같이 겸손했으나 사람들 앞에는 담대했다. 그래서 베자는 칼빈을 가리켜서 “그의 말은 마치 전쟁과 같았다.”, “칼빈의 말은 한 근이나 되는 것 같았다.”(L. Nixon, p. 31)라고 했다. 칼빈은 뛰어난 암기력으로 성경 연구와 신학 연구를 한 뒤 성경만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도 강해설교를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천재성을 가졌다. 그래서 칼빈은 1년에 286회의 설교에 186회의 신학 강좌를 담당했다(베자의 칼빈 전기 1). 여기서 우리는 강해설교자 칼빈의 지칠줄 모르는 정열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칼빈은 조직적이고 냉철한 의지에다 천재적인 암기력, 거기에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고자 한 열정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탁월한 강해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강해설교로 개혁을 완성했다
여기서 교회사학자 워커(W. Walker)의 말을 들어보자(pp. 433, 432). 칼빈의 설교가 수사학(Rhetoric)적인 기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그의 설교는 간단명료하고 단순하고 직접적이었다. 칼빈의 설교에는 그의 지적인 명석함과 논리적 강점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칼빈의 진지한 확신은 비록 그의 말이 조용함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더해 갔다. 그는 천천히 말했음으로 설교를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퍽 용이했다. 칼빈의 성경주석 중에는 청중들이 기록한 것을 종합해서 엮은 것도 있다. 어쨌든 칼빈의 설교와 강의들은 언제라도 청중을 사로잡았다. 칼빈은 장시간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잠온 거의 없었다. 대개 아침 5시나 6시 경에는그의 참고서적들이 침대 곁에 놓여져 있었고 필기자가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저 불란서 출신의 대 칼빈연구가인 두메르그(Emile Doumergue, 1844-1937)는 칼빈 탄생 400주년에 기념 강연을 했다. 그가 강연 중에 한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하면 이렇다. 칼빈은 말씀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말씀으로 그 개혁운동을 성취했다. 칼빈은 때로 히브리 민족을 일으켰던 모세와 선지자들처럼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밀란과 콘스탄티노플의 군중을 그리스도의 강단 아래로 붙들어 매었던 위대한 감독들인 암부로스와 크리소스톰처럼 설교했다. 때로는 2년간 프로렌스를 개혁시켰던 개혁자 사보나롤라(Savonarola)처럼 칼빈은 말씀을 선포했다.
칼빈은 목사로서 또는 교수로서 강단에서 몇 달간 매일 말씀을 증거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몇 주간씩 하루에 두 번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서 장로회에서 권고의 말씀을 하는가 하면 금요일 모임에서는 시의회에서 말씀을 증거했다. 한마디로 칼빈은 16세기의 개혁파 정신을 주조한 제네바의 설교자 칼빈이라 할 수 있다.
실제적 삶의 적용을 하는 강해설교
루터가 성경번역의 왕이라고 지칭된다면 칼빈은 성경주석의 왕이요, 또한 강해설교의 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참된 복음의 증거가 없어진지 천년만에 가날프고 연약한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진지하게 성경을 강해하면서 설교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개혁이었다. 16세기의 한 그림 중에는 칼빈주의자와 교황주의자를 각각 저울에 다는 그림이 있다. 칼빈주의자는 신구약 성경을 올려놓았고 교황주의자 곧 로마가톨릭주의자는 그 저울에다 천국의 열쇠, 교황의 칙령, 교황의 왕권에다 여러 명의 사제가 저울에 올라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한권에 교황주의자들의 것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은 말씀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칼빈에게서는 물론 성경 주해와 설교가 항상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칼빈의 강해설교의 특징인데, 그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청중들이 항상 실제적으로 적용하여 신앙에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의 대 설교역사학자 찰스 다간(Charles Dagran)의 말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베자가 어디엔가 지적했듯이 만약 칼빈의 자질에다 파렐의 열정, 비레(P. Viret)의 쾌활성이 첨가되었다면 아마 거의 완전에 가까운 설교자였을 것이다.”라고 했다(Dargan p. 448). 이 말은 칼빈도 완벽한 설교자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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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설교의 방법을 제시한 칼빈_35 |
설교자 칼빈_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