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2-07-13 19:4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국제 신사 칼빈_37


칼빈은 국제 신사였다. 그리고 그는 국제맨이었다. 16세기는 변화의 여명기라고 해야 좋을 것인데, 그 당시는 오늘의 TV도, E-mail도, 신문도 없던 시대다. 동양은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미국도 없던 시대였으므로 주로 유럽 중심의 세상이었다. 그때는 교통도 발달하지 못하고 통신도 없던 시대였으나 칼빈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고 온 세계와 소통했던 국제맨이었다. 칼빈의 종교 개혁의 대선배인 마틴 루터는 국제맨이 못 되었다. 사실 루터의 우람한 체격이나 감성 그의 바리톤의 음성, 열정적인 설교 등은 전 유럽과 세계를 향한 비전을 가질만했겠지만 루터는 겨우 게르만 민족과 독일을 넘지 못했다.


전 유럽을 상대한 교회 개혁의 지도자

그러나 칼빈은 개혁의 선배인 루터와는 달랐다. 칼빈은 세계 곧 전 유럽을 상대로 한 교회 개혁의 사역을 감당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칼빈은 왜소하고 깡마른 체질에 병을 앓고 있었다. 특히 철저한 개혁주의 교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칼빈의 이미지는 강직하고 폐쇄주의적이며 독선적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칼빈의 사상과 삶은 범민족적이고 범세계적이었음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프랑스 사람이지만 그의 삶의 후반부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자로 살았다. 즉 칼빈의 조국은 분명 프랑스였지만 그의 활동 무대는 스위스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삶에는 이미 어느 한 나라 한 민족에 갇혀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밖으로 열려져 있었고, 그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보는 눈이 띄어져 있었다. 칼빈이 국제맨으로 지칭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유럽의 모든 왕들 그리고 제후들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편지를 교환하면서 종교 개혁의 지경을 넓혀 갔다. 둘째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워서 유럽의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 교육시킨 것이다. 실제로 제네바 아카데미는 국제신학 대학이며 국제 칼빈주의 대학이었다. 이제 칼빈이 실제로 국제맨으로서 역할을 했는지 자세히 살피기로 하자.


편지로 국경을 넘나들었다

첫째로 칼빈은 편지의 사람이었다. 그 당시는 신문도 없고 잡지도 없던 시대에 자기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종교 개혁의 교리적 체계를 전달하는 수단은 곧 편지 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칼빈은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개혁의 동지들에게도 편지는 보냈지만 그와 의견을 달리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자들끼리만 서신 교환을 한 것이 아니고 각국의 정치지도자와 교회의 지도자들과도 편지를 나누었다. 칼빈은 명실공히 전 유럽 종교 개혁의 지도자로 우뚝 솟아 일했다. 칼빈은 당시 유럽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 개혁의 통일 전선을 구축하려고 애썼다. 칼빈은 제1차 제네바 시대 이후 스트라스부르크 시대 그리고 제2차 제네바 시대를 통해서 쯔리히의 쯔빙글리파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독일의 루터파와도 회담을 여러 번 가졌다. 그리고 칼빈은 그들과 끊임없이 서신 교환을 하면서 개혁 운동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와 신학 교육을 하고 있을 때는 멀리 독일의 보름스와 프랑크프르트를 방문하여 조정자 역할을 했고 독일의 멜랑히톤과는 일평생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칼빈은 이탈리아도 방문했고, 모국의 성도들 즉 휴그노파들에게 여러 번 위로 격려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칼빈이 국제적인 인물인 것은 『기독교강요』를 쓸 때 프랑스 왕 프랑소와 1세에게 헌사의 서문을 썼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칼빈은 영국의 에드워드 6세에게 이사야서와 공동서신 주석을 헌사했다. 또 영국의 대 감독인 토마스 크렌머에게도 영국의 종교 개혁을 격려하는 편지를 썼다. 칼빈은 또한 폴란드 왕에게까지 서신을 올렸다. 그리고 칼빈은 로마 교회의 교권 지상주의는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지적했다. 또 멜랑히톤을 통해서 간접으로 루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칼빈은 당대 최고의 국제적인 인물로서 유럽의 종교 개혁의 총지휘관이 됐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국제 신학대학이다

칼빈이 국제맨이라는 또 다른 사실은 제네바 아카데미가 국제적 칼빈대학이요 국제적 개혁주의 신학대학의 성격을 가졌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개교하자마자 16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왔는데 보도매체가 없던 당시에 유럽 각국에서 이렇게 많이 몰려온 것은 기적 같은 사실이다. 당시는 마땅한 선전 매체가 없던 때이지만 요한 칼빈 목사라는 이름 하나 보고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몰렸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학생들 중에는 멀리서는 스코틀랜드, 영국, 화란, 독일, 헝가리, 가까이는 스위스와 프랑스 등에서 몰려왔다. 제네바 대학 출신의 요한 낙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고, 율시누스(Ursinus)는 젊은 나이로 독일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Heidelberg Catechism)을 만들어 개혁교회의 교리적 체계를 세웠다. 칼빈은 국제 신사, 국제맨이었다. 그래서 그의 개혁 신학과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도 전승되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토론의 명수 칼빈_38
교회의 개혁자 칼빈_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