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주권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 (4)
<지난 호에 이어서>
1. 하나님 지식의 주체에 대한 비평
3) 하나님 경외로서 ‘경건’의 주체 문제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단순히 지적인 인지에 머물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와 그 신적 영광을 아는 것이 곧 종교의 성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의 구체적인 논리를 살펴보자.
내가 알기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religion) 혹은 경건(piety)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John Calvin,『기독교 강요 上』,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1, 83)
칼빈의 이 진술에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인본주의적 한계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신지식의 목적을 ‘인간의 유익’과 연결한 점이다. 칼빈은 하나님 지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나,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신지식의 목적을 결코 인간의 실용적 유익에 두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이 언약하시고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그분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절대주권적 섭리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는 데 본질적 목적이 있다.(박용기,『의미분석 성경개론』, 성남: 진리의말씀사 2019, 23). 성경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고 선포하며 인간 존재와 지식의 목적이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명시한다. 인간이 누리는 평안이나 유익은 여호와를 아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산물일 뿐, 그것이 지식의 본질적 동기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유익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이는 여호와를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둘째는 ‘경건의 주체’ 문제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바른 지식에서 비롯된 경건이 실제적인 삶, 특히 그리스도의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능동적 반응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진리 인식의 주관자를 명확히 확정하지 못한 결과로, 결국 인간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로, 사랑을 실천하는 ‘집행자’로 세우는 인본주의적 구도를 만든다. 하지만 성경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증거한다. 경건이나 사랑은 인간이 지식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신앙적 증거물(credentials)’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창세전 작정하신 뜻에 따라 성령을 통해 성도 안에서 주권적으로 맺게 하시는 ‘성령의 열매’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 5:22)
칼빈이 지체 사랑을 참된 종교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이는 자칫 성도에게 “내게 사랑이 없으니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인가?”라는 인본주의적 불안이나, 사랑을 짜내야 한다는 율법적 강요를 낳기 쉽다. 성경신학은 이를 ‘주권적 통치의 실재’로 해석한다. 여호와께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각 지체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시고(고전 12:11), 성령의 감동으로 자원하는 마음을 주어 사랑하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이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힘써야 할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계시적 결과’인 것이다.
기독교의 ‘선(善)’은 시종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종결될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상황을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85)한 것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칼빈은 윤리적 개념인 ‘선(善)’을 하나님 지식과 직접 연관 짓는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는 일체의 선(善)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권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쳐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극도로 부패해져 있음이 확실하다.(John Calvin,『기독교 강요 上』,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1, 86)
칼빈은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그것은 곧 ‘부패’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거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라는 말씀처럼, 죽은 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응시하거나 섬길 수 없다. 인간의 부패함조차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가두어 두신 주권적 섭리의 결과이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전적 부패는 단순히 윤리적 실패가 아니라 여호와의 절대주권적 섭리의 한 단면이다. 인간 중심의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여 그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인간 본성의 타락상조차 하나님의 의지가 역사하는 ‘심판 상황’임을 확증해 준다. 즉, 부패한 인간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도덕적 실패를 넘어,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주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계시섭리 사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85)이라는 칼빈의 명제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 지식에 따른 경건한 삶은 인간이 법으로 지켜내야 할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성도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계시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간의 도덕적 완성에 있지 않다, 오히려 부패한 인간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 없이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정하는 또 다른 교만이 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인간 안에서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깨닫는 것이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라는 고백은 인간의 보답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부요함을 찬양하는 자리로 인도받은 성도의 자백이다. 하나님 경외의 삶은 인간이 지켜내야 할 생활의 법칙이 아니라, 창세전 작정하신 뜻(엡 1:5)이 성도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계시 사건이다.
신학의 핵심은 인간의 도덕적 개선이나 경건한 삶의 성취가 아니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엡 1:6)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선(善)과 경건은 인간의 결단에서 시작되어 삶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하시고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절대주권적 은혜로 시작되어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종결되는 여호와 중심의 계시 섭리이다. 인간은 단지 그 거대한 섭리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하고 찬양하도록 부름받은 수동적 존재일 뿐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