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가나안 성도’에 대한 근본 대안: ‘가정교회’ 양육
‘가나안 성도’. 이제는 익숙한 말이다. 익숙하다는 말은 보편화했다는 말이며 기독교 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출석하는 교회가 있어야 교인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고 믿었던 과거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사건이기도 하다. 마치 가나안 땅을 찾아 떠났지만 아직은 돌아갈 곳이 분명하지 않은 그래서 특정 교회에 ‘안 나가’(‘가나안’)는 성도들이 이제 흔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국 교회 지배 구조는 대개 인사·재정·교육을 당회를 중심으로 목사가 모두 거머쥐고 있다. 교회의 진정한 권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고 모든 성도는 각자 은사대로 수평적 상호 평등과 자율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는 정관과 헌법으로 세속 정치도 이미 몇백 년 전에 구습으로 던진 전제군주의 독재정치로 되돌아왔다. 로마가톨릭의 폭압적 교황제에서 벗어나 성경의 절대권위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이며, 그 전통 속에서 한국 교회를 수립했건만, 중세 로마가톨릭보다 더 부패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명백한 증거가 전체 교인 10.5%로 예상되는 100만 명 이상의 ‘가나안 성도’들이다.
이 분야의 전문분석가인 정재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에 의하면, 가나안 성도의 직분 중 서리집사 이상이 26.7%, 출석 연도 14.2년, 교회 활동 적극 참여도 90%, 그리고 구원의 확신은 48.1%라고 한다. 분명 성도임이 틀림없는 많은 이들이 바로 가나안 성도들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며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시대의 사조(思潮)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풍조라고 하기에는 우리 한국 교회는 절박한 면이 많이 있다. 개신교에 속한 서구 교회 성도들은 교회 출석과 상관없이 교회 자체의 가치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 가나안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서구는 1990년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unchurched chrisitian)’ 혹은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우리처럼 기성 교회의 부패와 범죄가 배경이 되지는 않았다.
151년 전(1866) 영국 웨일즈 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순교하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말과 함께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 성경’ 위에 한국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제 어마어마하게 비대해진 부유한 한국 교회는 자기 성도들을 배척하는 저주의 역사를 쓰고 있다. 정재영 교수가 밝힌 가나안 성도가 된 이유는 이렇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30.3%), ‘목회자가 싫어서’(24.3%), ‘같은 교인들이 싫어서’(19.1%), ‘신앙의 회의가 들어서’(13.7%). 네 가지 원인처럼 보이지만, 인과관계를 만들어보면 한 원인에서 파생된 원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목사가 성경권위의 자리를 차지하므로 신앙의 자율성은 없어지고 그런 목회자는 싫고 하지만 그러한 목사를 두둔하는 성도들과는 어울릴 수 없고 급기야 도대체 평생 믿어왔던 신앙의 정체가 뭔지, 자신은 누구인지 회의에 빠진다. 이것이 틀리지 않은 이유는 가나안 성도의 환경에서 탈출해 다시 교회에 출석할 경우 가고 싶은 교회는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대체 ‘올바른 목회자’가 누구인가다. 그동안 이렇게 속고 저렇게 속았던 유형을 반성해 봐야한다. 즉 올바름의 척도 문제다. 그리 어려운 답은 아니다. ‘성경권위’에 충실한 성경 교사가 바로 올바른 목회자다. 번역한 한글 성경이라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연구하고 성도들의 눈높이에서 양질(良質)의 바른 성경 진리를 전하는지, 이것이 바로 올바른 목회자의 기준이다. 학벌도 교단도 명성도 통솔력도 입담도 재치도 도덕성도 친근함도 외적 어떤 모양도 올바른 성경 교사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가나안 성도들 둘 중 하나는 교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또다시 신앙 인격을 무시당하고 강요받는 신앙이 두려워 주저하고 있다. 피조물의 피조물에 대한 신앙의 강요는 마귀적이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다. 성도들의 소통을 차단하는 행위는 ‘성령의 교통하심’(고후 13:13)에 대한 반역행위다. 목사의 말에 대한 무조건 복종이 한국 교회의 지배적 특성이라면, 이미 이것은 개혁파 교회의 전통을 포기했다는 징후가 된다.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하는 방식이 반드시 억압적 행태를 띠는 것만은 아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假裝)’(고후 11:14)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눈웃음치며 성도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상담하지만 자신의 말을 거역하면 뒤돌아서 모함하고 몰아낼 방법을 찾는 자들도 있다. 회유와 거짓, 속임수와 이간질 등으로 패거리 짓고 목사의 하수인으로 만들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농단한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적폐를 극복하고자 곳곳에 소규모의 교회가 새롭고도 신선하게 세워지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기성 교회의 적폐였던 인격적 교제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목사 한 사람만 군림하는 방식을 지양하기 위해 리더십도 공유한다. 그리고 배운 말씀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지 질문하고 토론도 하며 심지어 설교를 비평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의 핵심이 ‘신앙 양심의 자유’를 스스로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소규모 교회 문화에서 반드시 짚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다름 아닌 ‘가정교회’의 중요성이다. 주일 하루만 잘 보내서 성경 중심의 교회 생활을 회복할 수는 없다. 목사 한 사람한테 신앙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이유도 다름 아닌 가정교회를 소홀히 하거나 파괴했기 때문이다. ‘교회로 와야 한다’는 목사의 명령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 ‘가정은 소홀히 해도 좋으니 먼저 교회부터 섬기라’는 말로도 들린다. 한국 교회를 기소하여 재판할 수 있다면, 한국 교회 중범죄의 첫 순위는 물질도 독재도 아닌 ‘가정교회 파괴’가 될 것이다. 가나안 성도 중 기성세대도 이 범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에 가서는 복을 달라고 하고, 돈을 벌어서는 자녀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입시 지옥으로 내몰았다. 신앙의 부모로서 자녀랑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함께 공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경기 지역 교회 70% 이상 교회학교가 사라졌다고 한다. 차세대 신앙의 뿌리가 뽑히고 있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교회 탓 이전에 먼저 ‘가정교회’의 몰락에서 찾아야 한다. 현재 가나안 성도들도 바로 가정교회 몰락의 피해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가정에서 성경 말씀으로 착실하게 신앙 교육을 받는 기억이 별로 없다. 가나안 성도 100만 시대, 차세대 신앙인의 부재 시대, 대안은 ‘가정교회’ 양육밖에 없다. 길게는 고등학교까지 적어도 초등학교 6학년까지 차세대 신앙 교육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다. ‘가나안 성도로 살아라! 단, 자녀에 대한 성경교육과 하나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위해 신앙의 선배로서 대안은 무엇이냐를 우선 준비해야 한다!’ 아니면 순간 선택한 가나안 성도의 자유가 자녀의 신앙에 대해 무책임한 방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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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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