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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2 19:5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정신의 원형을 찾아 I : 하나님 이름 ‘여호와’ 회복하다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 8:22~31).

조금은 긴 내용이지만 하늘에 속한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담고 있는 본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언을 기록하게 한 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장본인이며 예루살렘 왕궁의 통치자이며 당시에 명실공히 주변 모든 나라의 조공을 받았던 당대 최고의 황제였다. 수많은 왕들과 궁녀들이 그의 지혜를 배우려고 방문하는가 하면 왕들은 줄줄이 사절을 보내면서 조공을 바치고 좋은 선린관계를 맺고자 했던 그 주인공이었다. 자신이 7년 동안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주면서 ‘하나님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을 자랑했던 제왕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재판, 아이의 진짜 어머니를 분간하는 그의 세기의 명재판 이야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대개 아는 내용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앞의 본문은 솔로몬 왕이 지혜를 찬송하는 맥락에서 자신의 왕국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창세전의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지혜’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기록하고 있다.
잠언 1장 7절부터 잠언 9장에서 솔로몬은 여호와 경외가 최고의 지혜임을 찬양하면서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잠언은 1장부터 31장 끝까지 본문 전체를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다. ‘지혜’가 일반적인 추상명사가 아니라 ‘삼인칭 주어(지혜가)’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앞의 본문은 솔로몬이 자신이 여호와께 받은 지혜의 실체가 무엇인지 노래하는 내용이다. 창세전 상황이기 때문에 이는 결코 솔로몬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이는 장차 참 지혜의 실체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언약을 찬양을 통해 예언하는 내용이다. 화려한 솔로몬 자신의 왕궁이 실체가 아니라 창세전 여호와와 지혜의 통치가 이스라엘 국가의 영원한 실체임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 처음에 눈여겨봐야 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여호와’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여호와’라는 고유명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진 다음부터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여호와는 창세전부터 그 이름을 가지고 계신 절대자이며 영원자존하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4~25절에 보면 지혜는 창세전에 ‘영원한 출생’을 하신 존재다. 그리고 지혜는 어떤 인격적 속성이 아니라 창조주(30절)로 소개되고 있다. 출생과 연관 짓는다면 여호와는 아버지인 셈이고 지혜는 아들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지혜가 창조주가 되면서 동시에 아버지인 여호와의 항상 기뻐하는 바가 되신다. 그리고 아들로서 지혜는 장차 만들어질 땅 혹은 나라 그리고 그 나라 안의 백성들이 태어날 것을 기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창세전부터 모든 천지만물을 아들인 지혜에게 맡기면서 항상 기뻐하는 영원한 절대자존자의 호칭이다. 모든 피조물의 작정을 창세전에 아들인 지혜가 모두 확정하고 있으며 여호와는 이에 항상 기뻐하는 아버지로서 함께 즐거워하는 절대자로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을 포함한 피조세계의 모든 사건은 여호와와 지혜의 창세전 작정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코 설명할 수 없으며 세상 모든 사건에서 여호와의 존재와 그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태초 곧 창세전에 존재했던 말씀이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로 세상에 오시면서 동시에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의 근원을 언약과 성취를 확정하고 계신 하나님의 이름 바로 ‘여호와’다.
제기하는 문제와 제안하려는 주장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신약 성경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에 즈음에서 신약성경에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우리말로 된 새로운 성경 번역이 나왔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절박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역성경은 앞에서 말한 그 중요한 이름 ‘여호와’의 중요성에 대해 무감각했다. 헬라어 ‘퀴리오스’를 영어는 ‘Lord’로 그리고 우리는 ‘주’로 번역했다. 퀴리오스는 히브리어 ‘여호와’ 번역이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에서 ‘여호와 이름 회복’은 성경 번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거사(巨事)가 될 일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번역에서 누락하거나 오역을 일삼는다면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창세전에 확정된 ‘언약성취’의 영원한 사역을 통해 계시되는 절대유일의 하나님 호칭이며 동시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언약성취섭리사’로 확정하는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단지 오역된 개념 하나를 바로잡는 문제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의 논리적 통일성을 확정하는 결정적 사건이 될 것이며 특별계시 기록으로서 모든 성경이 창세전 여호와 존재계시의 유일한 증거임을 확정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이는 500년 전 개혁파 신앙의 선배들이 로마 가톨릭의 사악한 화형틀에서 외쳤던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의 구호를 최종적으로 완결하는 사건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 중차대한 일의 성사를 소원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자신의 사역임을 창세기 1장 26~28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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