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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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18 10:0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영성(靈性) 훈련’의 허와 실 바로알기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왕상 22:20-23)

앞의 인용 본문은 어느 모로 보나 도덕적 기준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신자들에게 충격적이다. 인간의 상식으로 기독교의 신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악과 거짓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상세한 절대주권적 섭리는 쉽사리 납득할 수 없다. 거짓을 믿게 하여 북이스라엘 왕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 섭리가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나오는 성경 본문도 드물 것이다. 여호와께서 악행과는 전혀 무관한 욥의 가족과 재산 그리고 그의 몸을 사단에게 내어 주는 사건(욥 1:12; 2:6)에서는 그래도 사단이란 존재가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고 그 악의 세력에게 욥을 맡긴다. 사단이야 물론 여호와께 모든 것을 허락을 받아야 하며 그래서 여호와께서 욥을 치신다고도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직접 욥을 때리기보다 사단에게 맡겨버린다. 물론 이러한 섭리도 인간의 보편적 감성으로는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앞의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의 입에 직접 넣어버린다(23절)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성경에 나타난 어떤 사례라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거짓을 믿게 하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방법은 성도들의 상식적 판단을 뿌리째 흔들어놓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지상에 있는 아합왕은 수백 명의 선지자들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하지만, 그 모든 선지자들의 말은 참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이 지상에서 진리와 거짓을 두고 수많은 인간들은 오늘도 논쟁을 벌인다. 고소에 고소를 반복하고 증인과 증거를 수없이 제시한다. 그렇게 해도 숨겨지고 왜곡되는 일이 허다하다. 최고 권력자를 믿었지만 그는 거짓말쟁이였고, 믿고 뽑았던 정치인은 세상 속물 중의 속물인 자들이 허다하다. 조금 전까지 진리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하던 자가 가룟 유다처럼 배신의 입맞춤을 하는 것도 태반이다. 그런데 그러한 거짓의 흑역사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역사라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란다. 그분의 살아계신 명백한 증거가 바로 이 세상에 무수히 반복하는 거짓이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일상적 상투어가 되어 버린 ‘영성(靈性, Spirituality) 훈련’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짚고자 한다. 우선 이 말에 큰 함정이 있다. 영성 개발은 인간 스스로 훈련하면 얼마든지 개발 가능한 것이라는 대전제가 암묵적으로 지배한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말이야 개혁파 신학의 영성이라고 하지만 흘러가는 모양새나 구체적 실천을 보면 기존의 부흥회나 이방 종교에서 행하는 자기 최면이나 자기도취로 빠지기 십상이다. 영성 훈련의 기원을 찾아가면 중세 로마 가톨릭의 수도원 운동이다. 주지하다시피 로마 가톨릭은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의 공로가 결정적이다. 인간 스스로 할 만큼 노력하고 그다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변종이요 왜곡이다. 이러한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 알아도 함부로 그 말을 쓰기에 주저할 텐데 그 방법까지 따라 하도록 가르치는 개신교 지도자들의 신앙지도를 보면 무지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앞서지만 다른 사적인 목적으로 성도들을 혹세무민하는 것으로 보이면 감정을 절제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개신교의 로마 가톨릭 모방에 대해 응답이라도 하는 것일까? 유럽의 로마 가톨릭은 영성 훈련을 위해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활용한다고 한다.
‘영성’은 성경에 근거해 그 말뜻을 풀어보면 ‘성령의 속성’이다. 즉 삼위 하나님의 호칭과 직결된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양육시키고 무장시켜 진리로 투쟁하게 하며 최후 승리를 이끄신다는 바로 그 하나님 능력과 영광 선포를 뜻하는 내용이 영성의 본질이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영성 즉 성령의 존재와 능력과 속성을 확증하는 진리 내용이 꽉 차 있다. 하지만 현재 많은 교회들은 성경 진리 자체에 몰두하기보다는 영성 훈련이라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대체 성경강론을 배제한 신앙 성장의 여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교회 부패의 원인이 영성 부족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인위적 프로그램 중심의 행사를 벌인다. 한국 교회의 부패는 보혜사 성령께서 지상교회의 흥망성쇠를 통해 교회의 유일한 주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계시 사건으로 봐야 한다. 코로나19 감염 난리 중에 한국교회는 점점 성경연구와 성경공부를 줄이는 경향을 보인다. 빨리 만나서 예배 의식이나 갖추고 빨리 헤어진다. 교회 지도자의 관심이 성도 한 명에게라도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 그야말로 예배 의식에 참여시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리의 말씀 선포가 줄어드는 그 틈을 ‘영성 훈련’이라는 왜곡된 변종의식으로 무지하고 힘든 성도들을 또 한 번 다른 질곡에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하나님께서 아합왕 시대 선지자들의 입에 담아놓은 거짓말의 반복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영성 훈련 프로그램은 하나로 단순화해야 한다. 성경진리의 절대적 권위로 돌아가길 간절히 기도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로 읽는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도구나 부속물이 결코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예배 참석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성경강론이나 성경연구나 성경공부 시간은 점점 줄어가며 영성 훈련을 한다는 말은 공허하며 맹목적이다.
앞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여호와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이 왕 될 때부터 그 나라가 흔들리는 갈대 신세처럼 지내다 결국 가나안 땅에서 뽑히고 요단강 건너편으로 붙잡혀가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왕상 14:15) 그래서 아합왕도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지만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은 수백명의 선지자가 아합에게 거짓을 말하게 하는 심판을 섭리하셨다. ‘영성’은 전적으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그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만 바탕을 두게 하실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어떤 숭고하고 화려한 종교적 의식이더라도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약 3:15)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기 직전까지 보여주신 장차 임할 보혜사 성령의 사역 즉 성령의 본질과 속성(영성)이 무엇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름 아닌 성경을 가르치신 것이다.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44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32, 44-48)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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