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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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1-29 20:2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말의 증거로 말씀의 권위 정립하기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사 40:8, 10, 12-14)

통상 자연 만물은 영원히 반복한다고 알려져 있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했던가. 타종교의 세상만사에 대한 특징을 요약한 언어이긴 하지만 자연 만물에 대한 현상에 나타난 특징을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개념으로 보인다. 세상 모든 만물이 끝없이 돌고 도는 유전(流轉)의 과정을 겪는다는 말이다. 그 변화의 수 없는 반복 과정이 인생이며 세계이며 우주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전도서 1장 1절은 그러한 변화가 헛된 것임을 깨닫도록 한다. “전도자(傳道者)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여기서 헛됨은 단지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뜻은 그 핵심은 아니다. 인생 헛됨의 가장 심각한 부분이 태어났다가 죽은 인생의 일회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생의 심각한 위기 상황은 피조물로 태어나지만, 창조주를 모르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창조주를 심판주로 모른다는 비극이 바로 그 핵심이다.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깨달음이 단지 목적이었다면 전도서 1장 1절 기록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인생 허무함을 (부처처럼) 근본적으로 통찰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관 정립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함을 절감한다.
인생의 허무함은 인생의 마지막이 있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은 창조주가 만물을 심판하는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우리가 주어진 현실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다는 말은 장차 임하실 여호와 하나님의 만물 심판의 증거를 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주로서 이 땅에 임하는 사건을 현재 역사에서 간파하는 것,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감지하는 것, 이것이 인생무상에 담긴 본질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40장의 인용 부분을 숙고할 이유가 크다.
선지자 이사야는 구약의 마지막 부분인 선지서의 시작 부분 그 이상의 뜻을 담고 있다. 그 담긴 뜻이 매우 심오하며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매우 소중한 ‘황금띠’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특히 이사야 40장은 이사야 1장부터 39절까지 내용과는 차원이 다른 대전환의 내용이 시작한다. 즉 남유다의 필연적 패망 예언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 이사야 1~39장이라면, 40~66장은 장차 도래한 여호와의 나라, 이 땅에 오실 메시아(그리스도) 예수가 세울 나라에 대한 구체적 예언이기도 하다. 그 예언의 중요함은 여호와의 자녀 범주에 이방인도 함께한다는 것이며 이방의 땅도 예루살렘처럼 거룩한 땅이 된다는 점이다. 나아가 예루살렘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이제 세상 모든 나라에도 세워진다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예언을 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의 중요한 부분을 간추려 본다면, 유대나라도 예루살렘의 성전도 모두 사라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선다’는 예언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신적 권위의 진리로 항상 존재하는 증거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한 모든 세상 만물이 파멸한다는 사실에서 발견한다. 예루살렘의 패망 소식은 곧 여호와의 영원한 말씀-이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영원한 로고스의 존재와 관련된다-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다윗이 세운 예루살렘성과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은 결코 영원한 나라와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여 친히 다스리며 마지막으로 상급(포상)과 보응(형벌)의 심판을 완결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를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도 이렇게 정하신 여호와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이 비밀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호와의 신(사 40:13)을 부어줄 때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만물통치와 최후심판의 비밀은 이 세상 어떤 피조물도 자기 지식으로 알 수 없으며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관여할 수 없다. ‘여호와의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최후 심판을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모두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이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우주적 규모로 선포되는 지점이다. 순간순간 인생의 종말을 예고하는 하나님의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인생인데 어찌 감히 “공평의 도(道)”를 운운하며 세상 “통달의 도(道)”(사 40:14)를 찾겠다고 가당치도 않은 너스레를 떨겠는가. 여호와의 신이 충만하여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창조조와 심판주를 알게 된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 그는 바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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