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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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2-26 21: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비성경적 ‘목사’, 성경적 ‘강론자’


44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4~48). 


인용 부분은 누가복음 마지막 장면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구약 성경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난 그리고 일어날 모든 사건이 언약 되었으며 그대로 성취할 것을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 주신다. 물론 이렇게 깨닫게 하신 내용은 승천하시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강림하여 기억나게 하시는 사역으로 성취된다. 그리스도 예수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미래 죄사함의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성취될 것을 언약하시고 그 일에는 반드시 증인(證人)을 세워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상세하게 일러주신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예수가 지상에 계시면서 하신 마지막 사역은 ‘성경 강론’이셨다. 구약을 풀어서 자신의 사역은 구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주시고 그 일은 앞으로 제자들도 그 증인이 된다고 약속해 주신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이 장차 받아서 수행할 사도권은 다름 아닌 보혜사 성령께서 주관자 되시는 성경 강론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 증인 이상(以上)도 이하(以下)도 아닌 일이 된다. 이상도 아닌 이유는 사도들이 아무리 증인 노릇을 잘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자랑이나 권세를 부릴 일이 아니라는 말이며, 이하도 아니라는 말은 아무리 하찮은 일로 보이거나 고생을 하거나 처참하게 죽거나 상관없이 그것이 바른 성경 강론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증인이 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하늘에 속한 증인임을 확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구약의 모든 사건을 자신의 일로 가르쳐 주시는 ‘성경 강론자’의 모범을 보여주셨으며 장차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경 강론자’의 사역을 하게 될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는 세속권력처럼 칼과 창을 동반한 무력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서 확장되며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일로 완성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올바른 증인은 오직 ‘성경 강론자’로서 역할만을 바르게 하도록 하시는 것에 따라 좌우된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사역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당시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강론하시는 과정에서 특별히 구별된 시간과 공간이 따로 없었다. 들판에서 바닷가에서 선상(船上)에서 세리 집에서 거리에서 성전에서 장소를 초월하여 전하셨다. 표적을 보여주시고 반드시 그 표적을 해석해 주셨다. 사도들도 후에 (모두는 아니지만)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것이 아니라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살아계셔서 천상(天上) 사역을 하고 계시는 증거라고 했다.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그렇게 ‘성경 강론자’로서 증인의 역할을 했으며 짐승 같은 신분으로 버림받아 살던 이방인들에게는 바울 사도가 평생 동안 ‘성경 강론자’이면서 ‘성경 기록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 노릇을 하게 된다. 그 사도들에게 특별히 종교적으로 구분되는 공간과 시간은 없었다. 거리든 마차 안이든 감옥이든 법정이든 그들이 보내져서 ‘성경강론’하는 그 시간이 바로 천국의 확증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설립되는 곳이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성경의 마지막은 사도 요한을 통해 감옥에서 기록하게 하셨다. 그리고 요한 2서와 3서를 보면 자매들에게 ‘가정교회’를 잘 돌보라고 권면한다. 그 권면의 핵심은 부모는 가정(교회)에서 자녀들에게 올바른 ‘성경 강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유언이다. 거짓을 전하는 자는 문도 열어주지 말라고 했으며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만큼 성경강론을 통해 알고 믿는 것이 동일한 지체가 되는 것은 교회의 유일한 사명임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개혁파 교회의 전통에서 왜 교회의 유일한 지표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은 오직 ‘성경 강론자’ 이상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성경 강론자의 중요성과 관련해서 우리는 여기서 오역(誤譯)되어 그릇 사용하는 성경 본문 한 곳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 4장 11절이다.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는 내용이다. 이 본문은 보혜사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성경 교사’를 매우 중요한 은사로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가볍게 여기거나 묵살하고 오직 ‘목사’라는 글자만 강조함으로써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인지 망각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목사와 교사’로 번역한 내용은 얼핏 보면 목사도 있고 교사도 따로 있다는 뜻처럼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 사본을 보면 ‘투스(정관사) 데(접속사)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의 구조로 되어 있다. 정관사 ‘투스’가 두 명사를 모두 지배한다. 그러므로 두 인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두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포이멘’은 양치는 목동 혹은 목자이며 ‘디다스칼로스’는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사다. 포이멘은 신약 성경에 18회 나온다. 사복음서에 15회 나오며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 그리고 에베소서에 나온다. 그런데 다른 부분에서는 목자(牧者)의 뜻으로 번역했으나 유독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는 ‘목사’로 번역했다. 교회의 세속화와 성경진리의 타락이 가속화하고 그 중심에 목사의 성경권위 훼손이 늘어나고 교회의 절대표지인 하나님의 말씀이 뒷전으로 물려나면서 많은 한국 교회들은 결국 그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헬라어 ‘포이멘’이 등장하는 복음서의 해당 본문을 보면 목자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증거하는 말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한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 나오는 ‘영혼의 감독자’로서 목자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승천 직전 상황인 누가복음 24장 48절은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양무리를 잘 따르도록 하는 모범은 바로 성경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소개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성경적 강론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목자에 담겨 있는 뜻은 분명하다.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다른 양무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목자가 할 일이다. 목사에게 양의 소유권이 넘어왔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단지 모든 성도들의 생명과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것이 증인으로서 목자의 유일한 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의 목사가 이러한 ‘성경 강론자’의 자기 직분과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망각하면 이내 자신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가게 된다. 이러한 자를 성경은 ‘적그리스도’라고 한다. 양무리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 목자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밖에 없다. 혹여 어떤 목사가 자기 몸을 불사름에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로 돌아갈 공로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양무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일 뿐이다. 이러한 뜻에서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포이멘 다음에 ‘디다스칼로스’가 뒤따른다. 디다스칼로스는 뜻은 선명하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성경 진리를 소개하는 안내자다. 진리 말씀이 풍성한 푸른 초장으로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인도하는 안내자다. 성경 진리를 멀리하고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자신의 양무리로 착각하는 것은 거짓 목사가 하는 소행이다. 성경 강론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목동’ 사역을 바르게 하는 많은 증인들의 회복을 간절히 소원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영혼 없는 교회’에서 ‘영생의 교회학교’로!
비성경적 ‘예배시간’, 성경적 ‘강론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