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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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17 19:1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뻔뻔한 종놈’에서 ‘무익한 종’으로!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5~10).


종교개혁 정신의 원형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권위의 회복을 갈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성경권위보다 높은 것들이 너무 많고 한국 교회를 성경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배경으로 한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성경권위 앞에서 뻔뻔한 것들의 뻔뻔한 경우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손에 들고 펴고 읽는다고 말하는 신자들이 아직도 수백만 명이 달하는 곳이 우리 한국 교회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과 진노의 경계가 모호할 일들이 비일비재한 곳이 또한 한국 교회다. 성경을 몰라서 그렇게 하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성경이고 진리고 필요 없이 의도한 자기 욕망만을 좇아가는지 구별을 할 수 없는 불법의 현장이 여기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면전에 두거나 손에 들고 하는 말이 성경의 문맥이나 본래 기록된 의도와 거의 관련 없이 자기 욕망과 욕구의 수단으로 이리저리 사용하는 것은 결코 진리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몽매함이 또한 가세하면서 교회 성장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강도의 소굴’이 된 곳이 허다하다. 모든 진리의 저작권이 하나님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좋은 대로 마음껏 이용하다가 이제는 자기 소유물인양 성경을 놓고 벌금배상의 소송까지 벌어지는 곳이다. 가히 성경권위로 세워진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성경 수모의 역사, 성경 수난사’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 참담한 성경 진리 수난사는 더욱 교묘하게 악순환하고 있으며 진리계승과 보존과 발전의 용오름이 아니라 진리몰락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다. 주의 종이라고 하지만 주인을 교묘하게 속이는 뻔뻔한 종놈의 행세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받은 것이 그렇게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뭔가를 더 달라고 뻔뻔하게 ‘주시옵소서!’를 외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면, 이는 분명 진노와 심판으로밖에 달리 평가할 여지가 없다. 

위에 인용한 본문은 예수님처럼 권세와 능력을 더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훈계하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분을 조금 따라가 보자. 사도들이 예수님처럼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도록 믿음을 더 달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겠다 혹은 주지 않겠다고 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유를 든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뿌리를 뽑아 바다에도 심을 수 있다고 하신다. 이 말은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강조하는 말이다. 제자들은 심중에 그러한 큰 믿음을 더 달라고 간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의 능력을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믿음의 주관자이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직접 답하지는 않으시지만 자신이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사역으로써 자신이 믿음을 줄 수도 있고 주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님 나라의 주권자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신다. 어떤 종이 밭 갈거나 양 친 후 돌아오면 주인이 수고했다고 주인의 상에서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가서 주인이 먹을 음식을 차려준 후에 먹고 마시는 동안에 옆에서 수종을 든 후에 먹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은 종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강조하신 내용이다. 종은 끝까지 종이다. 그러한 종을 주인은 좋아한다. 종은 수고한 것에 대해 대가를 받을 수 없다. 현재 계약 관계로 주고 받으며 일하는 우리의 통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비유의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의 통념과 상식을 넘어선 논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www.ibt.or.kr) 그러면서 예수님은 명령한 대로 잘했다고 종에게 사례하는 주인은 없다고 한다. 종으로서 죽도록 충성했으나 보답을 결코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가르쳐주신다.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 능력을 꽤나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종의 신분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혹여 능력을 좀 행한다고 해서 주인이 된 것처럼 결코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무익한 종이 아니라 ‘뻔뻔한 종놈’이 된다. 한국 교회에는 희한한 말도 있다.  목사를 ‘주의 종님’이라고도 한다. 결코 아니다. 무익한 종과 뻔뻔한 종놈, 두 종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무익한 종’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셨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권위로 뻔뻔한 종놈들을 무익한 종의 제자리로 돌려주길 간절히 바라는 절박한 시대를 살아간다. 다음과 같은 ‘무익한 종’들의 찬양이 진리의 말씀으로 회복되길 또다시 간절함만 커진다.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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