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맹목적 성경 읽기’에서 ‘계시적 성경 해석’으로!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삿 10:6~8).
구약 성경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후부터 다윗 왕 출생 전 아직 ‘왕이 없어서 백성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삿 17:6; 18:1; 19:1; 21:25) 시기까지 일어났던 특별계시 기록을 담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세워 국가통치를 위한 언약을 이루시기 전까지 12명의 사사(士師, 샤파트-히브리어)를 등장시키면서 무려 300년 이상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혹독한 고통과 시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고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도록 전 국토에 걸쳐서 훈련시킨 내용들을 담고 있다. 앞에 인용한 본문도 그 내용 중에 한 부분이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여호수아와 그 당시의 선조들이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대로-삿 23:14~16)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섭리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변의 우상과 잡신들을 섬긴다. 한마디로 여호와만을 경외해야 할 거룩한 땅 가나안이 언약 자손들에 의해서 잡신들의 만신전(萬神殿, Pantheon)으로 타락한 상황이 일어난다. 이러한 역사를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40년을 떠돌던 시간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광야 생활 40년보다 예닐곱 배 많은 기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매우 거칠고 혹독하게 섭리하신 기간이다. 사사기에 기록한 내용을 얼핏 보면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의 언약은 보존되어 성취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폐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전개된다. 가나안 땅의 온갖 잡신 우상들이 300여 년 이상 여호와보다 더 큰 위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할 때마다 사사들을 세워 구원해 주시는 은총을 베풀기는 하셨다. 하지만 고난과 구원의 과정이 수백 년 동안 반복하는 과정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간적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일만 생길 것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점점 여호와를 버리고 원주민들의 잡신을 섬기는 배반으로 이어질 것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이미 여호수아 시대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오래전 모세 시대 레위기 27장과 신명기 28~30장에서 언약한 바가 이렇게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주어(主語)’로 삼는 언약과 성취 해석구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의 현상을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다는 현상론을 넘어서는 성경해석의 틀을 요구한다. 인간 구원 중심으로 보는 구조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계시라는 원리로 해석해야만 언약대로 범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할 수 있다. 우상 잡신들을 섬기는 타락한 범죄가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언약하신 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원리를 따라가면 우리는 어떤 철학자가 말한 ‘하나님의 죽음’과 같은 경악할만한 최악의 사건을 보거나 들을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무조건 맹목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라, 성경의 어떤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확증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해석 틀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간 한국 교회는 성경 읽기를 맹목적으로 강요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질문하고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게 하는 성경 교육에는 너무나 소홀했다. 성경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회를 규모 면에서 급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은 형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교회에 가면 당연히 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가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이른바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도 성경 전체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설교 주제를 정하고 성경 본문은 설교를 위한 ‘도구’로 써먹기에 바빴다. 다종다양한 설교 방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각양각색으로 성경의 본래 뜻이 왜곡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맹목적인 성경읽기는 단지 예배 의식(儀式)을 거행하는 한 순서가 되었으며 목사가 어떤 설교를 하든지 예배 시간에 참석한 것으로 자기 위로를 삼는다.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예배에 참석해서 찬송도 부르고 성경도 읽고 그리고 헌금도 나름대로 했으므로 하나님이 예배(제사)를 받아주시고 세상의 부자들처럼 세상의 복을 주실 것이라는 매우 이기적인 방식으로 자기 위로를 삼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갖는지, 성경에서 계시되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신적 속성을 지닌 분인지, 왜 성경은 단순한 인간의 문헌이 아니라 신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인지, 이러한 중요한 물음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성경권위에 대한 입장과 성경해석의 원리에 대한 뿌리를 찾아가면 한국 교회는 대부분 16세기 종교개혁 전통의 핵심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권위 전통을 ‘계승’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성경권위를 확보하는 문제는 성경을 수백 번 읽는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 증명 중심의 해석 원리를 확증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는 매우 엄격한 원리가 있다. 성경의 바른 해석 주체와 주관자와 적용자는 오직 ‘보혜사 성령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성경을 정확하게 잘 해석하자는 말은 삼가야 할 것이다. 얼마만큼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시고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지 모든 주권은 전적으로 보혜사 성령께 있다.
이러한 해석의 대전제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보혜사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분명히 진리를 듣게 된다고 약속하신 내용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시론(時論)을 통해 성경권위 회복이라는 종교개혁의 절대이념,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성경권위 확증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증거를 가지고 여러 방식으로 안내를 하고 있다. 성경권위 확증과 보존을 위한 여호와 계시 중심적 성경해석의 틀을 ‘언약성취섭리사’로 이 지면을 통해 재차 반복적으로 소개했다. 성경해석의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의 운동력에서 비롯하는 것임(히 4:12)을 다시 명심하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순서 그대로 왜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신적 권위를 지닌 진리의 말씀인지 또다시 안내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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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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