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허위(虛僞)의 육적 제사’에서 ‘진리의 영적 자유’로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33~34).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대로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주전 586년) 다윗 왕조의 종말로 보이는 이 사건은 이미 오래전 모세를 통해 예언된 바 있으며 멸망에 임박해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거듭 예언된 바 있다. 그런데 인용한 본문을 보면 놀라운 예언이 나온다. 남유다의 멸망 135여 년 전 이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게 멸망했다. 33절의 인용에 보면 이미 망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를 다시 ‘이스라엘’로 지칭하면서 회복될 내용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회복된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맺으실 새언약의 내용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모세가 받은 돌판에 기록된 언약이 아닌 ‘인간의 마음’에 새겨질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이다. 누가 누구에게 여호와를 알라고 권면할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그 마음에 분명하게 새겨질 것이다. 나이도 상관없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마음에 새겨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지식을 확장되는 방식도 아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수준대로 어른도 자기 수준만큼 각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그 마음에 기록된다. 이것이 바벨론 제국에게 곧 침략 당해 멸망할 다윗 성과 불타버릴 예루살렘 성전 면전에서 전달된 매우 놀라운 약속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아하! 이제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마음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법이 오기 때문에, 돌판이나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다스리던 유대 나라와 유형 건물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버려도 되는구나’하는 생각에 도달하기도 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혈통의 방식으로 태어난 백성이 아니다. 이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는 자로 태어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의 통치를 받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계 21:1; 고후 5:17)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가 추상적인 막연한 개념 규정이 아닌 너무도 확실한 증거가 있다.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새겨진 영생 소유의 백성들이 바로 우리 자신 ‘성도들’이며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소통하는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엡 4:13)인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교회는 이런저런 장소에 있는 외부적 유형이나 형태나 모습(건물이나 예배의식 등)으로는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영적이며 영원한 실체로서 하늘나라를 계시(啓示) 영적 세계에 속한다. ‘영생의 주되신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인 교회,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천국 백성, 바로 이러한 신분이 우리 성도들이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이러한 고귀한 성도의 신분을 스스로 외면하거나 망각하고 혹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이방 종교나 무속인과 같은 행세를 하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의 앞에서 성도의 신령한 권리를 포기하기 일쑤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한테 성경진리를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이른바 지체라는 자들이 모인 교회에 오면 성경진리보다는 목사를 중심으로 종교 권위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게 된다. 그리고 성경진리를 탐독하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증하기보다는 몸과 마음과 재물을 드리며 인간이 만든 제도에 순응하며 진리 확증과는 크게 상관없는 ‘당회원’이라는 직분의 상승에 온갖 열정을 바친다. 그러는 와중에 고민하는 많은 성도들은 성경 구절 몇 개로 접근하는 적그리스도 이단 집단에 먹잇감이 되고 희생양이 된다. 수십 년 교회를 다녀도 스스로 교인이라고 위로할 뿐 내면에 새겨진 성도의 가치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 확증하는 경우는 힘들기도 하고 이제는 점점 드물기도 하다.
진리의 도성,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한국 교회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의 건전한 성경적 전통마저, 최소의 여지마저 사라지는 다급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세상의 이목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세인들에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전당으로 교육하고 양육 받는 곳이라는 이미지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 곳곳에서도 거창하게 기념행사를 하면서 보냈던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이 2년째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 보면 종교개혁의 세 가지 원리, ‘성경권위’, ‘만인제사장’, ‘이신득의’는 여지없이 사라진다.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세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받은 자녀(엡 1:3~5)라는 자기 정체와 자존감은 점점 망각하고 있다. 목사를 제사장으로, 건물 교회를 ‘성전’으로, 기쁨의 연보를 ‘제물’로 당연하게 여기며 변질되는 교회 문화는 이방 종교나 무속이나 로마 가톨릭에서 하는 의식(儀式)과 거의 같아졌다. 아니면 출석하는 교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싶은 마음이 지배하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의 자녀인 다른 성도들이나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 재물을 쌓으려는 ‘투자처’나 ‘미래 보험’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연일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한국 교회의 치부 폭로는 모두 돈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적게는 수천만 원부터 많게는 수조 원에 달하는 그 재산에 파묻혀서 성도의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진리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잘 보존하기 위한 복음전도자로 생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스스로 자신이 하는 목회가 비성경적임을 알면서도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방법이라며 당당하고도 뻔뻔하게 말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에 새겨진 진리의 법, 하나님의 말씀,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고민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재물을 향한 탐심을 충족시키거나 실현하고자 하는 길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금방 들어서게 되어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서구 개혁파 교회가 성경중심적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혼돈의 늪에 빠진 것은 이미 오래다.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무차별적 공격 앞에서 미력으로 버티던 힘겨운 싸움이 이제는 세속과 타협하는 것이 건전한 기독교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자기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진리의 법을 진리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일은 진리의 기둥인 교회의 생명이다’는 말은 별무소용인 시대다. 하지만, 개탄스러운 한국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말씀 성경진리를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는 성도는 분명히 있다. 지척인 북한에, 중국에 그리고 이슬람 국가에, 힌두교 국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협 앞에서 보혜사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견디게 하고 있다는 것에 무한 감사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목사에게 아멘’에서 ‘하나님께 아멘’으로! |
‘맹목적 성경 읽기’에서 ‘계시적 성경 해석’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