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재난 시대에 성경적 역사관 회복하기
2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22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3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 24 네가 네 종을 통해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제일 높은 곳에 들어가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25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내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리리라 하였도다 26 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 28 네(앗수르의 산헤립 왕-필자 주)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29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사 37:21-29)
인용한 본문은 주전 721년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앗수르 제국은 북이스라엘을 함락한 후 남유다도 침공한다. 남유다 히스기야 왕(주전 715-687)은 예루살렘 함락이 임박하자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하신 다윗 왕국의 영원함’(삼하 7:16)에 의지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처럼 멸망당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의 본문을 따라가면서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의 역사를 대할 때 성도들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와 그 능력을 깨달을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히스기야 왕의 절박한 기도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응답하신다. 이사야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침략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규정하신다. 즉 앗수르 제국은 남유다를 침공한 것이 이 전쟁의 본질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23절) 곧 여호와 하나님과 전쟁을 하려 했다고 꾸짖는다. 남유다를 침공하여 약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고 조롱한 앗수르 왕 산헤립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침략은 곧 하나님에 대한 대적 행위로 간주하신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당시 애굽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한 앗수르 제국의 전쟁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는 사실을 히스기야와 남유다 백성에게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창세전부터 준비하신 일이며 북이스라엘과 달리 남유다는, 그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제국의 침공에서는 반드시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26절)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와 그 백성들이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침략당해 맥없이 사라진 이유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에 근거하며 북이스라엘과 주변 나라 그리고 남유다를 침략한 행위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거슬러 분노한 행위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행한 오만함’(28-29절)이라고 판단·정죄하신다. 그러므로 산헤립의 앗수르 백성은 장차 패망하되 갈고리로 코를 꿰고 재갈을 물려서 끌려가는 참혹한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앗수르 제국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그렇게 패망당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역사 기록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 역사관 정립의 확고한 토대를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것이다. 세계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에 근거한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인류의 흥망성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인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와 함께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는 대로 역사를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우선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역사의 주관자를 하나님이라고 단지 말한다고 모든 게 믿어지고 머리와 가슴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역사를 왜 이렇게 비참하게 이끌어 가느냐는 반문이 맹렬하게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세상의 역사, 인류 생존의 역사가 인간의 상식적 판단으로 결코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세상의 종교가들은 이러한 역사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많은 추측과 상상, 예측과 판단으로 상황을 설명하고자 시도하지만 이는 점점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적대감으로 흐른다. 이러한 사실 또한 다음 사실을 반영한다. 인간이 공감하는 상식으로는 세계의 창조주와 심판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다는 냉정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증명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성경 계시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여호와 하나님-필자 주) 이루어 네가(앗수르 왕이-필자 주)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26절) 표면적으로 볼 때 인간이 행하는 듯한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 섭리에 바탕을 둔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과학적 판단과 인과관계를 통해 결코 해명할 수 없다. 인간의 행위에서 출발해서 역사의 의미를 밝히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진리가 아니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가 점점 성경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은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아래 들어가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라는 점에 애통함이 클 수밖에 없다.
세계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에 근거하며, 동시에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한 분명한 지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하는 보혜사 성령의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역사관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정보에 의해 세상 사람들의 판단 속에 매몰당하지 않는 것이다. 세인의 판단에 동반 매몰된 인간 중심의 역사관은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고 역사의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하고 역사의 판단도 인간이 하며 나아가 역사의 마지막도 결국 인간에게 유익함이 돌아와야 한다고 보는 태도이다. 가령 코로나19 대재앙으로 인류가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판단을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서 출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매우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 주관자인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며 코로나 예방과 방역에 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명확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필자 역시 코로나19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감염되었다는 양성 판정이 나온다면 역학 조사에 철저히 임하고 그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일에 협조하고 다른 감염원을 차단하는 데 협조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학 조사에 임하는 일에서 이 세상을 섭리하시면서도 때로는 무서운 질병으로 인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식은 방역 당국의 협조 이전에 훨씬 중요한 문제다. 이는 예방과 방역, 자발적 조사와 보건 당국의 지시를 준수하는 것과 질병으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얼마든지 병행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국가에 순응하겠다는 태도는 아니다. 국가의 방역 정책에 대한 동의와 적극 참여 그리고 이웃에 대한 배려심이 무서운 질병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확실성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방역 당국의 정책과 조치에 따르는 것은 국민의 의무 이상의 신앙적 가치가 부여된다. 물론 국가의 방역 정책에 따른다고 국가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얼마든지 그 정책에 부당함이 있다면 당당하게 맞서서 국민으로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우선 고려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은 사건으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반드시 앞서야 한다. 국민으로서 헌법이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 국가 기관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고 이웃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홀로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성도라면 결코 망각해선 안 될 부분이 있다. 철저하게 성경 진리에 바탕을 둔 신앙이 우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앙하지 않으면 인간과 세상에 대해 분노 가득한 탓을 할 수밖에 없다. 가족 중에서, 교인 중에서, 이웃 중에서, 형제 중에서 얼마든지 속이고 광화문 집회에 참석해서 소위 여러 사람에게 몹쓸 ‘민폐’를 끼친 자가 나온다. 국가가 정한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겨 민형사상 고발을 당하고 법적 처벌을 받을 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성할 수도 있고 국가 정책에 더 강한 반감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도라면 여기서도 결코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인류 역사를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다. 이것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세태로 추락한다. 그래서 코로나19 감염이 확대하면 할수록 성도가 떠안아야 하는 이중 걱정은 감염 확산의 우려와 동시에 세상 논리에 매몰되어 하나님에 대한 확산이 세파 속에 매장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확신한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야 세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균형과 조화는 그만큼 세상의 이웃들에게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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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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