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개혁 정신의 원형찾기 ⅩLIV: 성경적 국가존망론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 10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7-8,10-11)
남유다는 20여 년 동안 3차에 걸쳐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리고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종살이한 후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인용한 본문에서 강조한 부분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남유다를 패망케 한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하는 부분이다. 남유다 백성을 20여 년 동안 칼과 창으로 잔인하게 죽이고 굶겨 죽이는 작전을 펼치고 염병까지 창궐할 때 급기야 예루살렘성을 함락시키고 성전까지 불태웠던 세력에 대해 평안하기를 기도하라는 것은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지 참으로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이다. 70년 후에 바벨론을 존속시키다가 그 후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포로 신세에서 ‘평화를 망친’(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 정립을 위해 필요한 사안이라고 본다. 이러한 점을 앞의 본문을 배경으로 삼아 택한 백성이 속한 해당 국가의 존망 역사를 섭리하시는 신적 계시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앞의 본문에는 무엇보다 사건의 주어를 강조하고 있다. 바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이 사건을 인간의 상식적 판단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먼저 여기에 나타난다. 남유다의 패망 직전에 소개하는 신의 이름,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다. 만군의 여호와란 모든 전쟁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라는 뜻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열조에게 계시된 신의 이름으로 언약하시고 그대로 성취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연결해 보면 인류의 모든 전쟁을 주관하시는 여호와는 그 역사를 작정하신 뜻에 따라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가 주전 605년부터 586년까지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건은 850-800년 전 출애굽 지도자 모세 시대에 이미 약속한 내용이다. 레위기 27장과 신명기 28-30장에 이스라엘 곧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어떻게 멸망당할 것인지 매우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다. 칼과 기근과 염병을 겪으면서 이방 나라의 침략을 받아 거듭거듭 망해간다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에 담긴 뜻이다. 처참한 전쟁을 통해 오래전에 언약한 바를 성취하면서 여호와라는 신의 존재와 그의 능력을 두렵고 떨리는 방식으로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만군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셨던 전능한 신 하나님이시다. 남유다 멸망 직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 20여 년 동안 처참한 멸망의 역사가 진행하는 가운데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 호칭은 ‘평화의 땅’(예루살렘)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이름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유다의 멸망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하는 유일하신 참 신임을 확정해 주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남유다의 비참한 멸망 과정에 담겨 있는 사건의 핵심이며 신적 지혜의 실마리가 된다.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라고 했던가? 허구다. 역사를 주도하기는커녕 해석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수백 수천 가지의 사건 사고가 난무하는데 그것을 하나의 통일된 시각으로 역사적 의의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구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반복한다고 해서 비극의 현장이 평안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이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남유다 멸망 20여 년 전부터 망하는 과정 20여 년까지 모두 40년 이상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임이 틀림없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신의 무능함이 아니라 전능하신 능력이 드러나는 생생한 증거임을 40년 동안 깨닫게 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전후에 많은 선지자를 보내주시고 또한 기록으로 선지서 17권(이사야~말라기)을 남겨주신 것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사건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국가존망의 의미가 바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계시하는 데 있다. 이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갈 남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는 바벨론에 잡혀가더라도 바벨론에 항거하지 말고 오히려 70년 포로 생활이 안정되도록 바벨론의 평안을 기도하라고 했던 것이다. 평안하게 잘 살라는 말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깊이깊이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바벨론에 대한 복수는 남유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용도가 끝나면 멸망하기 때문이다. 바벨론제국뿐 아니라 모든 세상 나라들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섭리를 이루어가는 도구이며 수단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바벨론 포로 생활은 칠십 년이 차야 하듯이,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 사회적 불안과 안정은 하나님의 정한 시기가 차야만 끝난다. 이러한 사실을 선지자를 통해 알려주는 목적은 귀환의 시기가 분명하다는 사실에 앞서서 모든 나라에 대한 섭리 역사는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신 분명한 증거임을 알게 하는 데 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안다’고 하신다. 즉 인간의 예측과 상상, 합리적 추론과 상식적 판단으로는 결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과정부터 하나님의 자녀 각자에게 일어나는 행과 불행의 반복, 희비가 교차하는 삶의 연속에 대해 자기 이해력과 자기 판단력으로 해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는 무한한 은총 가운데 거하게 할 때 국가의 존망 역사 속에서도 신적 ‘평안과 미래 희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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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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