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적 인식론 회복하기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5-18)
앞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유대인 삼대 명절 중 마지막인 초막절(유대인의 조상이 출애굽 후 광야 40년 동안 했던 천막 시절을 기억하며 또한 추수와 포도 수확을 끝마친 후 벌이는 유대인 축제)에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전한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가 보여주시는 표적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출처를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교육 전통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가르쳤느냐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는 사도로 부름받기 전 유명한 바리새인 율법교사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행 5:34; 22:3) 예수님 당시 구약 율법의 전승 족보가 확인되지 않는 유대인 교사는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확인된 자만이 위대한 스승 ‘랍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그러한 전통에 속하지 않았으며 30세까지 누가 보더라도 갈릴리 지역 나사렛 출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형제들마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당시 예수님을 아는 모든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객관적 사실은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의 아들이다’였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특히 요한복음을 통해 인간들이 알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전면적으로 전복시키는 지식의 대혁명, 진리의 대전환을 야기하신다. 30세가량 그리스도로서 사역하시기 전에 예수님의 진리 인식 상황은 누가복음 2장에서 볼 수 있다. 자라면서 지혜롭고 총명해졌다는 사실을 말할 수도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증언하시는 내용을 통해 살펴볼 때 열두 살 예수의 총명했던 모습은 육신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 교육과는 무관해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성이시고 본성은 하나님이시다.(요 1:1) 이미 하늘에 속한 영원한 진리인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사건이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시간 순서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본성이 신성이신 그리스도는 창세전 진리의 본체로서 영원한 존재로 계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창조 사역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함께 하셨다.(잠 8:22-31; 요 1:2-3). 이러한 사실로 인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세상에 먼저 태어났지만, 예수께서는 ‘자신보다 먼저 존재한 분’(요 1:30)이라고 증언한다. 이런 점을 통해 우리는 마태복음 2장 11절에 나타난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사건을 다음과 같은 명법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왕이신 메시아(그리스도)께서 박사들로 하여금 왕인 자신에게 예물을 드리도록 하셨다.’ 즉 문법적 주어 이상의 의미를 우리는 요한복음과 또한 신성 충만을 증거하는 많은 표적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러한 ‘창세전 영원한 출생의 신비’를 통해 우리는 열두 살 예수님의 지혜와 총명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명 열두 살의 아이였지만 그 본성은 창조주의 신성이 충만한 그리스도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기독교 인식론은 보혜사 성령께서 홀로 주관하시는 하늘의 능력과 지혜와 총명으로만 가능하다!) 성전 지배자들인 율법 선생들과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신 예수의 지혜(눅 2:46-47)는 세상 기준으로 말하는 ‘똑똑한 아이’의 범주로 결코 대체할 수 없으며 그러한 범주에 넣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신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8:14) 갈릴리 나사렛 출신,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유다와 야고보의 형 등의 이해 방식으로는 결코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파악할 수 없다.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신 예수는 이렇게 당대 유대인 율법사들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에 대해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허구를 폭로하고 또한 거짓을 참으로 아는 것에 대해 심판을 행하신다. 그러면서 자신이 소유한 진리를 자신에게 속한 백성도 그 진리가 ‘하나님한테서 왔는지 자기 스스로 꾸며내는지 알게 된다’(요 7:17)고 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 선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유대인들이 묻자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고 답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식은 오직 아버지께서 믿게 해 주셔야만 가능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알게 하신다고 증언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2)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 땅의 무지한 군중들을 위한 중보기도(중보기도는 그리스도만 하실 수 있는 기도다. 현재 무분별하게 남발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를 해 주시며 알게 하시고 믿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그리스도께 주신 것이므로 진리는 오직 아버지로부터 온 것’(요 17:7)일 때 진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로써 진리를 주관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요 14:20)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신학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성령론이다. 이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사역하신 사도행전 1장 12절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성이 지배하는 진리 체계로 확정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승천 후 지상 교회의 원천과 목표와 이념은 보혜사 성령께서 기록한 말씀을 통해 확증하신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12절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의 ‘본주어’는 성령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아버지께 영광 받기(요 12:22-23) 전 향후 모든 진리는 전할 성령을 약속하셨다.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성령]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5) 보혜사 성령은 자기 임의로 말씀하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작정에 함께 하신 성령이므로 오직 성부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한다.
기독교 인식론에서 진리 인식 주체와 주관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三位)의 사역에 근거한다. 이것을 시간 역사적인 방식으로 ‘삼신(三神)’으로 이해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시간화하여 피조물의 차원으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한 차원에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능한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밖에는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성경적 지식론은 인간의 지적 무지와 행위 무능과 인격적 불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가 주관할 때 가능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은 오직 성경권위(sola Scriptura!) 회복을 완결하는 길밖에 없다.(성경권위 확증에 대한 상세한 증거는 www.ibt.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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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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