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적 정명론(正名論) 정립하기 I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 9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10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깊숙한 곳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더 있느냐 하면 대답하기를 없다 하리니 그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호 6:8-10)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창조주와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려준다. 기록으로는 주전 15세기경 모세를 통해 처음 기록했지만, 인류 시조 아담으로부터 노아를 지나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왕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그 이름 ‘여호와’는 개인에게서 특정 부족에게 지속하여 알려졌으며 그리고 다윗왕에 의해 통일국가 이스라엘이 수립되면서 그 영광스러운 이름은 절정에 다다르고 이어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린 그의 아들 솔로몬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여호와의 호칭은 당대 온 세상에 그 영광이 선포된다.
앞서 간단히 보았듯이 ‘여호와’ 호칭은 아담에게 언약하신 자손과 땅과 통치 언약 즉 ‘삼대언약(三大言約, threefold covenants)’(창 1:28)을 여호와의 절대주권적 능력으로 성취하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 땅에 메시아가 오시기 전, 앞서 말한 다윗에 의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호칭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의 역사서인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 치밀한 논리적 구조를 통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창세기 1-36장은 인류 시조와 이스라엘 열조에게 자손과 땅 그리고 통치를 반복하여 언약하는 말씀이며, 창세기 37장-민수기 30장에서는 자손 언약 성취를, 민수기 31장-사사기에는 땅 언약 성취를, 그리고 룻기-에스더에서는 통치 언약 성취를 통해 여호와 이름이 확증된다.[박용기 저, 『의미분석 성경개론』(성남: 진리의말씀사, 2019) 참조] 이로써 보건대 ‘여호와’ 호칭은 다름 아닌 구약의 역사서 구조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역사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내용을 언약하시고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존재와 능력이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성경이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 논리의 일관성을 지배하는 주제는 여호와 ‘이름’의 계시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호칭의 보호와 전수 그리고 관리는 오직 여호와의 주권적 섭리 속에 있다.
위에서 인용한 성경 본문은 북이스라엘 멸망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 호세아를 불러 예언케 하신 말씀이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주전 721년) 당하기 전(여로보암 2세 통치 기간, 주전 793-753년경) 그 멸망을 미리 알려주신다. 사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모세 시대 곧 호세아 이전 700여 년 전에 이미 언약된 바다.(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 참조) 선지서 전체도 앞서 말한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 호칭의 확증 내용이다. 다만 역사서와 구별되는 큰 특징은 메시아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예언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여호와의 메시아 언약을 확정하여 구약 계시를 완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의 본문을 좀 따라가 보자. 전쟁을 주관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 북이스라엘을 대적인 앗수르제국에게 맡겨 열한 지파 모든 백성을 진멸(盡滅)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 멸망 방법과 정도가 너무 혹독하고 심하여 시체를 불사르던 자들이 모든 백성이 죽었다는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북이스라엘 땅에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남기지 않아서 언약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는 여호와의 약속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10절)고 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여호와의 호칭을 여호와께서 보존하는 절대주권적 섭리 방식이다.
이 예언과 이후 성취된 내용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피조물로 하여금 제대로 부르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여호와 호칭이 거룩하고 ‘올바른 이름(正名)’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법을 동원한다. 북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이 처참하여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자손 번창의 언약이 폐기되는 지경까지 이른다. 어디에도 여호와의 이름이 보존되는 흔적이란 찾아볼 수 없다. 말 그대로 언약 자손이 모두 멸절당했으므로 그 언약을 수립하신 여호와 이름도 아무 쓸모가 없는 공허한 이름이 된 상황이다. ‘올바른 이름’을 다르게 말하면, ‘이름을 올바르게 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 이름이 그 이름값을 할 때,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행위를 할 때 그것을 ‘정명(正名)’이라고 한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각자 자기 이름에 걸맞은 행위를 할 때 ‘정명’이 된다. 전능자가 전능자의 능력을 보일 때, 언약하신 여호와가 그의 능력과 방법으로 언약하신 대로 성취할 때 바로 ‘성경적 정명론’이 확립 가능하다.
공자와 맹자의 교훈을 따르는 유학(儒學) 사상에서 ‘정명론’은 인간 이해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기 임무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항상 정명론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당장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임금이 임금답고 부모가 부모다워야 한다고 할 때, 도대체 ‘임금답다’ 혹은 ‘부모답다’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이다. 이 문제에 앞서 ‘임금다움’ 내지 ‘부모다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며 도대체 그 정체가 있는 것인지부터 밝혀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피조세계에 속한 피조물이 해명할 수 있을까? 유한한 인간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며 이기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학의 정명론(正名論)은 인간 본질과 실천에 대한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지고 있지만 더 깊이 질문할수록 그 대답은 더 멀리 사라지는 자기모순의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여호와 호칭에 담긴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는 전능자’의 바른 의미는 오직 성경진리에 근거한 여호와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여호와 호칭이 그 이름값을 명확하게 확증하신다는 말은 이 세상 모든 역사가 여호와의 언약과 성취를 드러내는 계시 사건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 이름이 변경되는 것은 정명(正名) 즉 ‘바른 이름’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른 이름 정립은 언약하고 성취하는 여호와의 이름을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성경적 정명론(正名論)은 하나님의 이름 즉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바로 여호와 자신이 절대주권적 방법으로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경진리 전체를 통해 확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 증명과 직결된 주제이다.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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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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