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독교의 ‘유일성’을 찾는 질문하기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 22-27)
현대 사상을 지배하는 특징을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탈근대주의)’이라는 말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신은 시간 면에서 모더니즘 이후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모더니즘(근대성)의 정신을 넘어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대성을 넘어선다는 것은 영원불변의 인간 정체성이나 역사의 절대법칙성을 더 이상 신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다양한 정치적 이념을 하나로 통일하는 공통의 상수(常數)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거부 반응이 보편적 상식이 된다. 그런가 하면 중심과 주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선이 모호해진다. 절대성의 자리를 상대성이, 인위적 통일성의 자리를 다양성이 대신한다. 절대자의 다른 이름인 ‘신의 죽음’을 설파한 현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이러한 정신문화를 ‘허무주의(nihilism)’로 이미 예견한 바 있으며 그의 예언은 적중하기도 했다. 인간과 세계에는 영원불변의 절대진리나 그러한 이념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니체는 허무주의라는 한마디에 담아 놓았다.
그런데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 사조가 전 지구적으로 광범한 충격을 준 곳은 바로 종교 문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불변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적 신념이 상대화한다는 것만큼 기독교에게는 더 큰 충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자연적 절대자 혹은 신은 단지 객관적 존재라는 사실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자기 신념의 확신과 판단과 결정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전까지는 적어도 종교(宗敎, religion)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생의 근본 문제와 궁극적 의미를 규정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인류 문화 유지의 결정적 체계로 작동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현재 세계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는 보편적 흐름임을 감안한다면, 종교는 이제 단지 상대적 문화 양식으로 끼리끼리 공유하는 행동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와 관습이 다양하듯이, 학문과 예술, 법과 제도가 서로 상충하며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종교도 오래된 관습이며 본성적 습성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특정 종교의 ‘절대화’를 고집하는 것만큼 더 큰 시대적 죄악은 없다. 종교의 절대화에 대한 사망 선고의 시대, 이것이 절대자 하나님 여호와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계 17: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절대진리로 확신하는 기독교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다시 한번 꼭 확인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성경을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습관적으로 교조적 신념으로 반복할 것이 아니라 절대진리 성경의 신적 권위를 스스로 확인하는 일이 교인의 유일한 책무로 남는다고 본다. 성경의 절대진리성 확정은 물론 몇 시간 안에 단숨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세태가 지구적 보편 현상으로 자리잡았는데 아직도 근거 없이 나의 신앙을 고집한다는 것은 더 우습고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성경이 과연 진리 요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절대 진리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선 하나하나 진지하게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 종교(宗敎)라는 말은 사실상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종(宗)’은 사물의 근원이나 근본 혹은 종족의 우두머리나 가장 큰 지배력을 지닌 것을 일컫는다. ‘교(敎)’는 가르침과 그 내용을 뜻한다. 이 말을 모아보면 사물의 근본에 대한 가르침 내지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최고의 통치 원리에 대한 가르침이 ‘종교(宗敎)’다. 가르침은 달리 말하면 질문과 답변의 무한한 반복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문화는 기형적이다. 왜냐하면 목회자 내지 종교지도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은 훌륭한 답변을 듣는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질문자를 경계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참종교로서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근본 물음부터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성경 본문을 보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잠시 숙고해 보도록 한다. 사도 바울은 토론과 논쟁과 변론의 도시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하여 아테네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매사에 종교성이 많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종교성이 많도다(데이시다이모네스테로스)’라는 말은 헬라어 ‘종교’에 해당하는 데이시다이모니아(deisidaimonia)에서 파생한 말이다. 이들에게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神)에 대한 두려움 곧 경외심이다. 부정적 의미로는 여러 가지 미신(迷信)을 말할 때도 데이시다이모니아를 사용한다. 앞서 인용한 본문 전체 맥락에서 종교라는 말을 이해해 보면, 바울이 전하는 바른 종교란 미신에 빠진 아테네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하여 경외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고 한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참신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교회)에 계시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진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데 나는 왜 교회에 가고 있는지?’, ‘왜 가고 싶어 하는지?’, ‘왜 교회에 나와야 된다고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이 생긴다. 바울 사도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데 ‘왜 특정 시간에 그곳에 와야만 한다고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더 심각해진다. 또한, 다음 설명은 더 깊은 질문을 유도한다. 하나님 여호와는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만 천하 만물에게 홀로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만물을 친히 다스리는데 사람의 경배와 예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내 우리에게 다음 질문을 유도한다. ‘도대체 우리는 정한 시간 정한 곳에 가서 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한다며 온갖 종교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가?’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인류 모든 족속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한 혈통이며 온 땅의 경계와 역사를 지정하신 분이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왜 특히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파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인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매우 가까이 존재한다고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하나님은-필자 주]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27절)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은 나에게만 함께 한다는 우매함에 사로잡혀 타종파 신도보다 더 용렬(庸劣)하게 다른 지체를 판단하고 정죄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거울삼아 이러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충실하지 않는 한 절대진리 성경에 기초한 건전한 기독교 문화의 우월성과 독자성은 쉽게 깨달을 수 없다고 본다. 기독교의 유일성은 타인에 대한 배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적 무지함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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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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