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영원한 언약의 근거, 여호와 자신의 맹세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장 6-10절/강조는 필자에 의함)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 애굽 통치하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다. 그리고 준비하신 대로 모세를 통해 애굽의 바로 왕과 그 신하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무섭고 두려운 열 가지 재앙을 보여주신다.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절대주권적 섭리로만 설명할 수 있듯이, 출애굽도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함을 보여준 신적 계시 사건에 주요 의미가 있다. 홍해 도하도 마찬가지의 신적 계시의 의미가 가장 중요한 신앙 교훈이다. 언약한 대로 성취하되 오직 여호와의 방법으로 즉 신적 주권의 섭리 방법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게 하신다. 홍해 도하 이후 열흘길이면 가야 할 길을 40년이 넘도록 들어가게 하시지 않는다. 출애굽 경로를 스마트 폰에서 검색하면 흥미로운 지도가 뜬다. 이스라엘 백성의 행로가 가데스바데나 이후 가나안 땅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0년 세월이 더 지난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열흘길을 40년으로 연장시킨 그 시간과 가나안 진입 경로의 방향을 조정한 이 사건을 인간의 감정과 판단과 상상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신자들이 통상 이야기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범주 안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이다.
요단 동편 땅을 먼저 정복하도록 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요단 서편 땅 곧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 500년 전 아브라함과 그 열조들에게 교훈했던 것처럼,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역의 출발과 그 동기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려준다. 앞에서 인용한 본문을 따라가 보도록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한 거룩한 백성이 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거나 강한 민족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 원천은 오직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며, 그 사랑의 증거로서 조상에게 하신 맹세를 여호와 스스로 지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맹세를 스스로 확증하여 계시하기 위함이 가나안 땅 정복 사건의 본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받은 백성들은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녀들은 은혜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자비를 일천 대까지 즉 영원히 누리게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 섭리는 택한 백성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맹세를 은혜로 받은 자기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지만, 이 신적 맹세를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이 드러날 때마다 기다리는 것은 긍휼이 아니라 두려움이요 무서운 심판이다. 이 부분을 인간 중심적인 도덕적 판단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가령 출애굽 직전 언약 자손이 아닌 애굽 백성들에게 임하도록 한 무서운 재앙들을 어떻게 도덕적 감정에 바탕을 두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바로가 불순종했는데 왜 애굽 백성 모든 장자가 멸망을 받아야 하는지 이 세상의 논리와 판단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창세전 영원한 언약의 위대함과 신비함의 논리가 아니면 결코 접근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그러면 ‘창세전 영원한 언약’은 또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맹세, 신적 사랑 그리고 영원한 언약이란 말은 세상의 문자 기록이지만 결코 세상 언어로 대체 불가능한 계시 언어다.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독립된 개인적 영역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언약에 따른 이 땅의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눈과 귀로 접하는 정보로 결코 평가할 수 없는 고귀하고 거룩한 삶이 그 본질이다. 신자들의 의로움과 정직함과 성실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가능한 것도 결코 아니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베푸신 영원한 언약의 영광스러움이 아니라면 성도로서 삶의 실체를 설명할 길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그 이름 여호와의 영원한 언약은 오직 여호와 자신의 자기 맹세 외에는 어떠한 것도 용납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신앙에 대한 확신은 더더욱 여호와의 맹세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아가페 사랑과 그 증거인 영원한 언약, 이는 모든 성도들의 입을 닫아버리는 마지막 언어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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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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