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난과 함께 하는 범사 감사론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장 14-22절/강조는 필자)
우리 교회당 많은 곳에, 성도들 가정 곳곳에, 성도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가게에 혹은 책갈피에도 등장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으로 받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 구절처럼 살아갈 수 있겠는가? 실천의 모양은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교회 생활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는 이 구절은, 역설적으로, 신자들의 삶 전체가 그 말씀에 결코 부합하지 않다는 책망과 경고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이렇게 앞의 구절은 맥락이나 정황과는 무관하게 그릇되게 오독 당하면서 해석과 적용의 왜곡을 야기한다. 하지만 이 구절에 담긴 진리의 심오함은 너무도 귀하고 귀하다. 아래에서는 이 구절에 담긴 기독교 복음 진리의 심오한 의미가 무엇인지 되짚어 본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주후 52~3년경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현재 테살로니키) 성도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아테네에서 기록했다고 하는(살전 3:1)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2차 선교여행 즉 헬라지역 선교여행에서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다.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서 (구약) 성경을 강론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경건한 헬라인 무리들과 많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7장 1-4절 참조) 하지만 유대인들이 헬라 반도까지 쫓아와 사도 바울 일행을 해하려고 하자 바울은 실라와 함께 베뢰아로 피신하고 또다시 그곳에서 핍박을 피해 아덴(아테네)으로 피신한다. 이렇게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 복음 전파의 방해와 성도들의 핍박과 환란의 대혼란을 겪는다.
아덴에 온 바울은 이 소식을 듣게 되고 가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갈 수가 없었으며 단지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 전서를 먼저 보내고 또 후서를 나중에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전서와 후서를 보냈다는 것은 교회의 현실적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서를 보내고 교회와 성도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온을 되찾았다면 아마 후서는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전서와 후서를 읽어보면 시종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는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살전 3:7) 겨우겨우 모아놓은 연보를 통해 더 연약한 성도들을 매우 힘겹게 보살피고 있는 상황이다. 살전 1장 6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필자 강조), 이들이 바로 복음 진리에만 의존하면서 극한의 환란 가운데서 진리를 지키고 성도를 보살폈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이었다. 앞의 말씀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진정한 성도가 누구인지 그들이 얼마큼 궁핍과 환란을 당하면서 오직 성령의 기쁨으로 견디었는지 모두 나타나 있다.
궁핍과 환란 가운데서 진리를 지키며 힘든 성도에게 ‘목숨까지 즐겁게 주기를 바라며’(살전 2:8 참조) 견디던 성도들이 데살로니가의 귀한 신앙 선배들이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상황을 보면 바울도 이곳에서 일하면서 성도들과 함께 연보를 모았고 그 연보로 성도들을 돌보았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바울이 전한 종말론 곧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 땅에 재림하시지만 그 날과 시간을 알 수 없다고 전한 진리가 왜곡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고 하는 거짓 선생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곧’ 재림하기 때문에 연보를 모아 놓을 필요가 없으며 그 연보를 써버리자고 하는 사악한 자들도 득세하고 있었다. 일하지 않고 놀면서 성도들이 모아 놓은 연보에 손을 대려는 악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에 바울 사도는 연보에 손대려는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살전 5장 14절)고 권면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회 내 악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 5장 15절)고 권한다. 힘든 정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견디지 못하게 하면’ 이것을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바울의 권면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형제를 위해 목숨까지 주고자 하는 성도들이 분명히 있었다. 힘들게 연보를 모아 놓으면 갈취해 가려는 악한 자들이 맹수처럼 혈안이 된 사악자들의 소굴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리를 지키고 약한 성도를 지키고자 했던 신앙 선배들이 있었다. 몇 푼이라도 남아 있고 몇 명이라도 남아 있어서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 고귀한 신앙인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억지로 피눈물 흘리며 버틴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쁨으로 진리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즐겨 지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자 하는 성도’(살전 1장 6절 참조)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다음의 말씀이 그들에게 진리가 된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간단히 말하면 진리에 토대를 둔 성도 사랑이 없는 곳에는 앞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과 저주가 임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애쓰고 수고한 미약한 연보가 귀한 다른 지체에게 도움이 되고 진리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상황만 허락된다면, 이를 삶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가는 귀한 신앙이다. 일상적으로 알고 있던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 말씀이 더 이상 왜곡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 데살로니가 전서를 세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는 5장 16-18절에 이어지는 너무나 명백하고 당연한 말씀이다. “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살전 5장 25-27절/필자 강조) 진리 안에서 함께 받는 고난을 빼버리고 진리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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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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