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바른 교사, ‘죄인 중의 괴수’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 6 사람들이 (……)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1:3-7)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목회서신이라고 한다. 특별히 어떤 부분을 두고 그러한 제목이 가능할지 생각해 볼수록 의문이 든다. 목회자를 위한 바울의 서신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바울의 다른 서신에는 목회자와 관련된 부분이 등장하지 않는가? 목회자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자라고 정의한다면, 특별히 앞의 네 서신서를 더더욱 목회서신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치리 조항이 등장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치리 문제는 로마서부터 바울의 서신 전체에 등장한다. 혹여 목회자가 성도들을 자신의 기준대로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는 더욱 심각한 태도다. 앞의 서신서들은 모든 성도들 곧 가정교회를 포함해서 말씀을 전하는 모든 교사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어야 한다.
성경 진리를 전달하는 원주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낸 보혜사 성령(요 15:26)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진리를 바르게 전하는 영적인 지도력은 인간에게서 비롯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4장 12-13절에서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12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권할 때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관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앙으로 낳은 아들이자 제자인 디모데에게 매우 엄격한 지도자의 요건을 알게 하신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온갖 거짓과 신화가 교회와 성도를 혼탁하게 하는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교회 치리의 전권을 디모데에게 주는 것이 얼마든지 속 시원하게 보이는 좋은 처사이겠는가. 하지만 디모데에게 전달한 서신의 첫 부분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디모데가 주체가 되어 교회의 진리와 치리를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바울 사도가 어떤 교회보다 오랫동안 3년이나 가르쳤던 에베소 지역의 교회는 바울 사도가 떠난 후 먼저 진리의 타락부터 엄습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족보를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허황된 족보처럼 만들어 신화의 족보를 의미 있는 교훈처럼 전하려는 거짓 교사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그러자 당연히 디모데로서는 이들과 논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본문의 정황을 고려할 때, 디모데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주장하는 자들과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디모데로서는 이들과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스승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논쟁을 하고 변론을 하는 것이 거짓 교사들을 이기는 것인지 매우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에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정답이 나온다. 그러한 변론과 논쟁에 휩싸이는 것은 ‘율법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율법의 선생이란 간단히 말하면 법의 입법자가 인간 자신이 되는 것이다. 즉 변론을 하면서 자신이 사용하는 말의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다는 말이다. 디모데의 경우, 그가 근거로 삼는 구약의 모든 말씀들, 바울 사도로부터 받은 다른 서신서들을 사용해서 거짓 스승을 이기고자 하는 모든 변론의 전략들은 바로 디모데 자신이 주체가 된다는 데 근본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애써서 비진리를 막아내고자 하는 어린 디모데의 눈물겨운 투쟁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근본부터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한다는 것, 이 말은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낸 바울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자신의 말이 자신에게 올무가 되는 자기모순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론을 위해 자신의 진리를 스스로 치밀하게 만들어 가면서 논쟁에 임하는 것에 대해 더 혹독한 규정이 나온다. 변론을 이기기 위해 동원하는 많은 정보를 모아 거짓 선생을 압도하고자 하는 행위에 대해, 성경은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오히려 질책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은혜가 없다면, 보혜사 성령의 돌보심이 없다면, 어떤 진리 전달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렇게 시작하는 말씀이 이른바 목회서신의 첫 부분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자기 법을 스스로 만들어서 변론을 일삼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한 범죄와 같다고 명시한다. 변론에서 스스로 승리하고자 하는 자는 바로 불법을 행한 죄인이며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경건함이 사라진 죄인에 불과하다. 나아가 부모를 치는 행위와 방불하며 살인자와 같고 추악한 행음자와 같다. 진리 변론을 위해 열심히 논쟁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11절) 증거와는 무관할 수 있다.
지치고 병들어 가면서 스승인 바울이 전해준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디모데에게 율법의 선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 알려주는 내용이 신앙으로 낳은 제자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이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관하지 않고, 보혜사 성령의 강권하심이 없다면, 그것은 자기 지식과 능력으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논쟁을 잘해서 말싸움에 이기고자 하는 것으로 심각한 범죄에 이른다. 바울 사도는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앞에서 진리 수호와의 요건이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게 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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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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