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맹세’: 계시신학의 원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앞의 인용한 말씀은, 피조물인 인간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계시한 내용이다. 성경을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자 할 때 성경 전체 주어가 오직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수천 가지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존재와 속성의 영광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문자로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기 전에 절대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에게 ‘맹세’를 하신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특별계시 기록인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으로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맹세’가 갖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에 인용한 창세기 1장 26절은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계획으로 어떤 사역을 하실지 계시한 내용이다. 먼저, 본 논의의 핵심은 아니지만, ‘우리’라는 개념의 오해를 풀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라고 했기 때문에 창조주가 복수가 되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개념 사용을 이해해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수형 ‘엘로힘(אלֱֹהיִם)’을 받은 대명사다. 엘로힘은 문자로 복수형 명사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할 때 단수 동사와 함께 사용하며 ‘존엄적 복수형(pluralis maiestatis)’이라고 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의 영광을 강조하는 계시 표현의 문법적 방식이다. ‘우리’를 삼위(三位)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암시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본문에 바탕을 둔다면 그러한 해석에는 많은 설명의 무리한 추가를 감행해야 함으로 큰 설득력은 없다고 본다. 의역을 좀 해 보면, ‘우리’는 존엄의 복수형 의미로서 엘로힘을 고려하여 ‘우리의 형상과 모양’은 ‘내 형상과 내 모양을 따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첫 장부터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의 사역이 자신의 절대주권적 의지에 의한 ‘맹세’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맹세가 언약하시고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해서 더욱 분명하게 나오는 말씀이 있다. 창세기 22장 16-17절 말씀이다. “16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언약의 말씀이다. 흐름의 구조를 보면 여호와의 맹세는 언약 자손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 ‘여호와 자신의 맹세’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여호와의 ‘맹세’는 여호와의 이름에 담긴 ‘언약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의미를 확정할 때 주로 등장한다.(출 6:8 참조)
맹세(盟誓)의 히브리어는 샤바(שבַָׁעַ)이다. ‘맹세하다’, ‘서약하다’ 또는 ‘자신을 결속시키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숫자 ‘칠’(שבֶׁעַ,셰바)과 연관성이 있으며 맹세의 완전성과 총족성 그리고 확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창세기 22장 16절의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에는 ‘맹세하다’는 동사가 니팔형 곧 ‘수동태 완료형’으로 기록하였다. 직역하면 ‘나는 맹세하였다’는 뜻이다. 이미 확정한 대로 반드시 그 언약을 성취할 것이라는 뜻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여호와 자신의 맹세는 무조건적 은혜언약을 변함없이 반드시 성취할 것을 계시하기 위한 개념이다.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 자신의 주권적 섭리를 확정하실 때 사용하는 말씀이 여호와의 맹세다.(창 24:7; 출 32:13 참조) 신명기 32장 40절에는 언약대로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여호와 자신의 맹세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그리고 여호와 자신의 맹세는 선지서에 집중해 있다. 이사야 49장 18절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그리고 예레미야 22장 5절과 24절, 46장 18절과 49장 13절에 나타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맹세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경 본문은 선지서 에스겔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겔 5:11; 14:16,18,20; 16:48; 17:16,19; 18:3; 20:3,31,33; 33:11,27; 35:6,11) 15회 반복한다. 언약대로 반드시 성취하시겠다는 여호와 자신의 단호한 의지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에스겔은 주전 593년(겔 1:1 참조)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기의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에게 이상(異象)으로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이다. 그 기록 시기(주전 593년)를 보면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게 2차 침략(주전 597년)을 당하고 4년이 지난 무렵이었으며, 바벨론의 마지막 3차 침략(주전 586년) 7년 전이었다. 약속 연대의 중요함은 언약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섭리 이해를 확증하는 데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의 최종 멸망으로 모든 백성들을 흩어버리지만 70년 후 약속대로 다시 유대 땅으로 모으겠다고 약속하신다. 물론 그 약속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에스겔 예언서의 핵심 주제는 ‘흩으시고 모으시는 예언’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본문 주석과 구조 분석은 ‘진리의말씀사’에서 발간한 박용기 저, 『성경강론 11』과 『성경강론 12』 5855~6208쪽을 참조할 수 있다.] 이처럼 여호와의 자신에 대한 맹세 표현은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사역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 밖에 스바냐 2장 9절에서도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중요한 말씀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 34-37절 말씀에서 피조물 인간은 결코 맹세할 수 없는 무능력한 자임을 깨닫게 하신다.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의지와 그 표명은 본질적으로 ‘악’이다. 참으로 엄하고 무서운 말씀이다. 자기 의지력이 없는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인간은 무엇인가 말하고 행동할 때 자신으로부터 나온 의지(意志)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생존의 원천인 의지(意志)와 의욕(意慾)을 ‘악’으로 규정하신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자기 중심적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고 살아가야만 하는 피조물의 자율적 의지 표명에는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복종보다 자신의 능력을 먼저 신뢰하는 무지함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정당하게 부르는지에 대한 판단은 인간이 판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껏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정당성은 오직 여호와 자신의 맹세에서 비롯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히 6:17)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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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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