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인가? 정의인가?
재작년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전(前) 대통령 국회 본회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지금까지 전직 대통령에 관한 뉴스가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지난 연말부터는 전전(前前) 대통령 소식까지 가세하면서 전직 두 대통령 관련 뉴스는 아마 방송 사상 가장 긴 저녁 ‘일일연속극’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사람은 503호 수인(囚人) 번호를 이미 달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도 그 번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나라 바로 세우는 일이 다름 아닌 최고 통치자에 대한 구속과 수사 과정이라는 사실이 씁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민에게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여망(輿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국가 이념이고 목표이다.
그런데 역대(歷代) 부패한 권력이든 성공한 권력이든 한결같은 뼈아픈(?) 진실이 근래 두 대통령의 수사 과정에도 또 드러난다. 바로 최측근들의 배신(背信)이다. 믿음과 신뢰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저버리는 일이 또 발생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믿었던 사람이 볼 때는 배신이지만, 반사 이익을 취하는 사람에게는 용기 있는 행동일 것이다. 인간의 마지막 도리를 저버린 배신의 칼날인가? 불의를 끊는 정의의 검인가? 답을 찾는다는 게 무색한 경우가 많다. 성경의 인류 역사는 배신으로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주 배신, 가인의 형제애 배신, 아브라함의 아내 두 번 배신, 사울왕의 배신, 다윗의 배신, 압살롬의 배신, 솔로몬의 배신, 히스기야의 배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들의 줄 이은 배신, 예수님 제자들의 배신, 아시아 교회의 바울 배신 등 성경에 나타난 배신의 사례는 무수하다.
하지만 배신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배신의 심각함은 창조주이신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반역에서 그 본질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배신은 인간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성경적 정의(正義)를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이른바 ‘배신’과 관련된 사건을 볼 때마다 혼동스럽다. 해결의 실마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는 이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제(難題)임을 재차 확인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할 수 없다면 배신과 정의의 문제는 정신적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