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유럽 교회,메마르고 불타는 서구 열강
유럽 특히 서유럽과 북유럽은 더 이상 기독교 문화에 기반을 둔 민족과 국가들이 아니다. 기독교 국가로서 유럽의 입지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2022년 7월 14일자 226호 사설 참조) 개신교 수백 개의 교회,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의 수천 개 성당들이 폐쇄되었거나 폐쇄 직전에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했던 유럽 교회의 기독교 진리의 수호와 보존 사명은 그 종말을 고하는 많은 징후들이 대신하고 있다. 기독교 진리가 영혼과 뇌리에서 사라지면서 남겨진 것은 ‘하나님의 죽음’을 공공연히 공식화하거나, ‘본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무신론 사상이다. 성경 진리에 바탕을 둬야 하는 기독교의 원천과 근본과 원리인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이제 더 이상 유럽 지성에서는 점점 찾기 힘든, 슬프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 역사가 지배한다.
그런데 유럽의 무신론 확산을 재촉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격한 진노의 사건들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500년 만에 찾아온 유럽 최악의 가뭄’ 사태다. 유럽을 관통하는 젖줄과도 같은 라인강, 다뉴브강, 포(Po)강, 이탈리아의 가르다강, 헝가리의 벨렌스호 등이 바닥을 드러냈다. EU의 옥수수 생산량과 해바라기 생산량 감소는 제일 먼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사료 작물에 의존하는 목축도 예외는 아니다. 강바닥이 드러나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침몰한 나치의 군함 수십 척이 흉물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더 큰 문제는 그 폐선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이 그득하여 인양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스페인에서는 7천 년 전 ‘스페인의 스톤헨지’라 불리는 수십 개의 거석(巨石)들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최대 1.8m 거석 150여 개가 원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누가 왜 세웠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기원후 약 120년경 로마군이 사용한 요새가 저수지 제방이 마르면서 1949년 이후 처음으로 전체 유적이 물 밖으로 나왔다.
프랑스 100여 개 도시에서는 수돗물 단수가 잇달았으며 물 사용 규정을 어기면 벌금 200만원을 내야 한다. 1935년 이래 87년 만에 가장 건조한 7월을 보낸 영국의 템스강 상류는 말라붙어 버렸다. 잉글랜드 남동부 햄프셔와 켄트, 서식스 등에는 수돗물로 정원에 물을 주거나 세차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카웁 구간 수위는 46㎝에 불과해 선박 운항 최저 기준(80㎝)에도 미치지 못했다. 라인강 인근 화력발전소의 석탄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에너지 수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독일과 프랑스 일부 원자력발전소에는 냉각수 부족으로 비상이 걸렸다. 사용 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냉각수도 수온이 상승하여 결국 발전 용량을 낮추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캘리포니아 클라마스 국유림 산불은 일주일 넘게 맹위를 떨치며 여의도 면적 80배를 태웠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마리포사 카운티에도 2주간 산불이 이어졌다. 미국 최대 인공호수 미드호가 역대 최저 수위로 내려갔다. 놀라운 광경이 드러났다. 변사체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상륙정 그리고 난파된 보트도 나타났다. 미드호 수위는 1937년 이래 가장 낮은 40% 수준이다. 그런가 하면 남미의 ‘코로나 맥주’를 비롯해 세계 최대 맥주 수출국 중 하나인 멕시코는 주류 생산 중단에 나섰다. 대통령은 가뭄이 심한 북부에 있는 주류 공장을 수량이 그나마 덜 부족한 남부로 옮겨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멕시코에는 생수 사재기는 물론 공용 물탱크 습격 사건까지 벌어지고 있다.
자연재해는 모든 자연 만물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배제하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미천한 판단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엄격하고도 무서운 자연재해에 대해 그 원인을 일일이 따져본다는 것은 어리석다. 유럽이 상대적으로 아시아나 아프리카보다 더 심한 범죄를 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는 매우 이기적인 판단도 삼가고자 한다. 인간의 죄악은 인류 사회 전체를 덮고 있기 때문에 재난을 당한 자는 나보다 더 중범자이고 그렇지 않은 나는 의인이라는 어리석은 생각도 접고자 한다. 가뭄이라는 자연재해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판단은 물을 얻지 못해 불평하기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엄정한 섭리를 하시는지 그야말로 근본적인 고민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특정한 누군가가 나보다 더 심한 죄악으로 인해 나보다 중한 특별한 벌을 받고 있다는 발상은 피조물이 창조주와 심판주의 권세를 찬탈하는 더 큰 범죄가 될 뿐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불편과 고통과 수난을 호소하면서 그 대책을 찾아보는 것은 살고자 하는 동물적 욕망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순간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기억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가뭄의 섭리 목적은 구름 한 점 비 한 방울을 만드시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다.
14: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 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 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 22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렘 14: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