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몰트만의 죽음,그가 남긴 신학의 과제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년 4월 8일-2024년 6월 3일) 교수가 지난 6월 3일 독일 튜빙엔에서 별세했다. ‘칼 바르트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현대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몰트만 교수와 이 시대의 이별은 세계 기독교계가 다시 한번 그의 신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몰입하게 하고 있다. 튀빙엔 대학교 신학대학 명예교수로 지내면서 에베하르드 융엘이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와 함께 20세기 후반 독일 개신교 신학을 주도했던 몰트만의 신학은 1907년 이후 한국 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한국 신학교와 교계의 조의 표명도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몰트만은 1926년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 육군에 입대하였지만 영국군 포로가 된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1945년 그 당시에,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포로로서 영혼의 수렁에 빠져 있던 나를 예수는 찾아주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왔다. (……)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 그는 나에게 왔다.” 포로수용소에서 고등학교 졸업시험에 해당하는 아비투어 자격 응시 교육을 받는가 하면 YMCA 도서관을 통해 당시 히틀러와 싸우면서 복음주의 신학을 전개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저작과 라인홀드 니버의 책들을 일찍 접하기도 했다. 종전 후 1948년 몰트만은 괴팅엔 대학교 신학부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 괴팅엔에는 게하르트 폰 라트가 구약을, 권터 보른캄이 신약을, 에른스트 볼프가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몰트만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은 한스 요아힘 이반트였다. 그리고 그는 오토 베버의 지도로 17세기 칼뱅주의자였던 모이제 아미라우트(Moise Amyraut)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 논문에서 몰트만은 아미라우트가 칼뱅주의 전통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정통 칼뱅주의자들과 일부 차이가 있었던 점에 주목했다. 몰트만에 따르면 아미라우트는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주장했지만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아미라우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당대 많은 칼뱅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아미라우트는 하나님 주권과 인간 책임 사이의 균형을 찾고자 했으며, 몰트만은 이러한 시도가 17세기 칼뱅주의 신학 내에서는 신학적 논쟁의 주요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몰트만은 아미라우트의 신학은 당대의 정치적이며 사회적 상황 즉 17세기 프랑스의 종교적 관용과 신학적 다양성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우리는 이러한 몰트만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후 진행되는 그의 보편구원론과 만유재신론의 씨앗을 엿볼 수 있다.
몰트만은 박사 학위 취득 후 개신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독일 고백교회 담임목사로서 1958년도까지 브레멘에서 목회를 했다. 이후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부퍼탈 신학대학교에서, 1963년부터 1967년까지는 본 대학교 그리고 1967년부터 1994년까지 튀빙엔 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서 가르쳤다. 그 기간 한국의 많은 유학생들이 몰트만의 제자가 된다. 대한민국 신학계에서는 1970년대 안병무 교수, 문익환 목사 등 한국 민중 신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김균진, 김명용, 유석성, 이신건 박사 등 다양한 교단의 한국인 제자를 양성했으며, 이후 장로회신학대, 서울신학대, 한신대 등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무신론적 ‘희망의 철학’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었던 『희망의 신학』(1964),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1980),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1985), 『예수 그리스도의 길』」(1989), 『생명의 영』(1991), 『오시는 하나님』(1995), 『희망의 윤리』(2010) 등 다수의 저술이 있다. 또한 그는 개신교회 교단뿐 아니라 정교회와 로마가톨릭의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장섰으며, 1963년부터 1983년까지 개신교와 정교회, 로마 가톨릭의 성례와 직제의 기준 마련을 위해 WCC 신앙 및 직제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기관지인 콘칠리움(CONCILIUM)의 공동 출판위원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서방교회 신학의 범주를 넘어 동방 교회의 신학을 포괄하는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면서 에큐메니컬적 시각에서 WCC를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몰트만의 사상과 행보는 분명 재비판이 필요하다. 신학과 신앙의 절대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감안할 때, 이제 고인이 된 그의 신학에 대해 성경진리의 권위에 근거해 선명하고도 객관적인 평가가 나와야 할 것이다.
몰트만의 오래된 제자인 김균진 교수(연세대 명예교수, 한국신학아카데미 원장)는 고인에 대해 ‘세계 신학계 거성 몰트만 교수님의 서거를 깊이 애도한다’고 하면서, “역사 상실의 문제성을 가진 칼 바르트의 신학에 반해, 몰트만 교수님은 역사를 주제로 가진 판넨베르크와 함께 20세기 후반기 세계 신학의 대변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김 교수는 독일 개신교회 총회장이었던 하인리히 벧포르드-슈트롬(Heinrich Bedford-Strohm) 목사의 말을 인용해 몰트만 교수는 ‘세계 교회의 위대한 스승’이었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앞으로도 세계 신학계에 그분을 능가하는 학자가 등장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애도의 뜻을 전하고 있다. 몰트만 교수의 신학은 한 마디로 ‘희망의 신학’이라 말하는 김 교수는 파멸과 고난과 죽음 속에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것이 성서의 말씀이라는 것이 몰트만 신학의 초석이라고 했다.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 온 신학과 유학생들에게 독일 교수들은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을 때 몰트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줬다는 점에 깊은 감동을 전하고 있다.
리처드 버캠(Richard Bauckham)에 따르면 몰트만은 자신의 신학이 지닌 일반적 특성을 세 가지로 소개한다고 한다. “성서적 토대”, “종말론적 방향설정” 그리고 “정치적 책임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모든 신학 작업을 끝내고 고인이 된 그에게 그대로 되돌려 물을 수 있다. 과연 몰트만은 성경의 신적 권위에 얼마나 의존하였는가? 종말론 중심의 몰트만 신학의 의의는 얼마나 성경적인가? 그리고 신학과 교회의 정치적 책임성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에 대한 몰트만의 이해는 얼마나 성경적인가? 이 물음의 명쾌한 성경적 답을 위해 우리는 그가 남겨 놓은 저작들에 대해 더 치밀하게 분석해야 할 것이며, 성경권위 아래서 그 답을 재차 확정해야 할 것이다.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해결하지 못했거나 오해했거나 잘못 해석한 부분을 말씀의 권위로 다시 바로잡는 것이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한국 신학을 사랑했던 그에 대한 예의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