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 ‘퀴어문화축제’가 남긴 분명한 과제
지난 11일 제17회 동성애자 문화축제인 퀴어문화축제가 ‘QUEER I AM’이라는 주제로 열려 역대 최장 코스라고 평가한 퍼레이드로 당일 일정을 마무리했다. 참가 추정 인원 5만여 명으로 서울광장에서 큰 충돌은 없었지만, 한국 사회 특히 기독교인들을 초긴장 시킨 행사가 되었다.
‘퀴어(queer)’란 말은 ‘괴상하다’, ‘기묘하다’는 뜻으로 동성애자들이 ‘비정상적 행위’로 비난받는 자신들의 성적 취향에 대해 다양성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퀴어(Queer)’라는 용어는 점점 그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레즈비언(Lesbian)과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와 트랜스젠더(Transgender), 무성애자(Asexual)와 간성(間性, Intersexual) 그리고 퀘스처너(Questioner, 아직 자기의 성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을 통칭한다. 자신을 동성애자로 밝히는 ‘커밍아웃’의 추세는 점점 확산하고 있다. 사회에서는 개인의 취향을 국민 기본권 측면에서 평등하게 적용해야 하므로 점점 동성애 보호법을 옹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렇게 점점 대거 ‘커밍아웃’하는 동성애자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가정에서부터 거의 전무하다. ‘설마 내 아이가?’하는 안일한 상상만 하는 사이에 수만 명 우리의 친구와 자녀들이 우려의 눈총을 받으며 작년보다는 좀 더 당당하고 편안하게 자신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미주와 오세아니아, 영국과 서유럽 그리고 북유럽 국가를 위한 많은 부스도 설치되었다. 이 나라들의 특징은 과거 기독교 국가들이었다는 점이 더욱 눈길을 끈다. 달리 말하면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종교적으로 명시했던 나라들이다. 기독교의 순수성과 이념이 점점 쇠퇴하면서 종교적으로 동성애를 단지 ‘정죄’했던 풍토가 더 이상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 동성애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2015년 6월 26일 미연방 대법원은 동성애 금지가 미국 헌법에 합치할 수 없다고 판결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주장해온 동성애 지지 정책에 손을 들어줌으로 동성애를 합헌화했다. 건국 정신으로 청교도적 가치를 수백 년간 지켜온 미국 기독교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또한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인 바른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허점의 적나라한 노출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계도 마찬가지다. 2016년 6월 11일 광장도로를 사이에 두고 덕수궁 대한문 광장 앞은 ‘동성애퀴어축제반대 연합기도회와 국민대회’가 열렸으며, 서울시청광장에는 ‘동성애퀴어축제’가 열렸다. 한쪽은 동성애 축제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가정을 파괴하는 죄악의 소굴처럼 간주하면서 동성애 축제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쪽은 울타리 역할을 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부스 안쪽에서 자신들만의 너무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난 섞인 우려와 그들만의 자유가 뒤범벅된 현장이다. 이것은 바로 기독교인으로서 동성애에 대해 정리되지 않은 우리의 현주소다.
더욱 눈길을 끄는 참가 단체들이 많았다. 특히 친동성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차세기연(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이라는 이름으로 104개의 부스를 만들어 참여했다. 차세기연 옆 부스(#27)는 ‘무지개_예수’라는 이름으로 목사와 신부가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성찬/애찬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밖에 총신대, 성공회대 등 기독교 대학 출신의 성소수자들 모임도 부스를 설치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 교회 안에 형제와 자매가 분명 동성애자로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서조차 어떠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성경의 몇 사례를 들어 동성애자를 성급하게 판단할 뿐 다른 어떤 복음적 대안이 없다. 동성애 문화축제를 만드는 자들이 1995년부터 20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오는 동안 교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탈동성애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기는커녕 힘겨운 투쟁을 해 오는 이들까지 같은 부류로 여겼다. 이제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이 확산하는 만큼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기다리는 ‘퀴어’ 형제와 자매로 향하는 우리의 사명도 동시에 확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