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의 진원지에서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지구촌을 경악하게 하는 사건이 이웃 나라 일본에서 발생했다. 지난 7월 27일 일본 가나가와 현(縣) 사가미히라 시(市) ‘쓰구이야마유리엔’ 장애인 시설에 난입한 우에마쓰 사토시(26세)가 50분 동안 45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19명을 살해하고 26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검찰청으로 송치하기 위해 태운 차 안에서 보도진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는 모습’은 아직도 몸소름 돋게 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어디인지 찜통더위의 열기마저 빼앗으며 고민하게 하고 있다. ‘히틀러의 우생학’ 운운하며 약자 중의 약자인 장애인 이웃을 마치 ‘인종 청소’라도 하듯 살상을 자행한 그의 만행을 단지 정신병 환자의 이상 행동으로 단정짓고 넘어가는 것에 대해 상식적 판단이 결코 용납하지 못하게 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속담이 아니라 평범한 진리가 되어가는 세상에 산다. 우리는 지금 ‘인간이 설마 …’라고 단정했던 판단이 이내 현실화되고 그 끔찍한 살상의 희생자가 바로 나 자신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8월 5일 현재) 85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는 ‘니스 대형 트럭의 테러’를 비롯한 서유럽 곳곳에서 발생하는 참극처럼 우에마쓰 사토시의 비수(匕首)와 같은 칼날은 더 이상 남의 집 이야기로 멈출 것 같지 않은 무서운 시대다.
이러한 참극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우리는 한 두 사람 희생자를 내는 사건은 이제 ‘일상사’처럼 받아들이라는 혹독한 요구 앞에 서 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잠재된 공포심을 안고 잠정적 희생양으로 살아가라는 말인가? 지금도 어디선가 계획되는 살상극이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요구한다. 이러한 두려움에 놀라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바로 평상시 정상인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내 가족 중에 아니면 가까운 친족 혹은 이웃 가운데 나와 불우한 이웃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참담한 좌절감의 엄습이다.
‘합리적 동물’인 인간의 특성은 자기 삶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이성적 판단으로 계산하고 예측하며 계획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동물이 내린 판단과 행동 중에는 어떤 동물의 세계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잔혹한 만행과 대량학살의 참극이 들어있다. 나치의 만행인 유대인 홀로코스트’,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인 아시안 홀로코스트’ 등, 나와 같이 생긴 인간이 준비한 살상 무기로 나와 같은 인간이 계획적으로 저질렀던 만행이다. 또한, 자신이 근무하던 건물에 침입해 저항하기 힘든 여성 장애인부터 50분 동안 45명을 살상했던 우에마쓰 사토시의 참극 과정도 들여다보면 ‘홀로코스트’의 서곡처럼 보인다. 어디까지가 정상인지 미친 것인지 그 경계가 정말로 모호한 시대다!
우에마쓰 사토시가 일본 중의원 의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470명, 자신의 지인에게는 2016년 10월까지 600명의 장애인을 안락사하거나 ‘살처분’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 그가 침입한 그 자리에 그 규모의 장애인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광극(狂劇)이었다고 짐작된다. 우에마쓰 사토시, 그의 아버지는 교사이며 자신도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되기 위해 사건 현장 인근의 초등학교에 교생 실습을 하기도 했다. 한 이웃은 그에 대해 ‘밝고 착한 아이’였다고 했다. 합리적이고 착하게 보이며 정상인처럼 산다는 것과 미치광이 비정상인 살인마로 산다는 것의 차이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홀로코스트의 뿌리는 이 모호한 경계선에서 결코 판단할 수 없는 형태로 자라고 있는 듯하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노의 깊이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릴 수 없는 무서움으로 엄습한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8~31) 인류의 창조자이며 심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전제나 피상적 지식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역사적 사실들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무서움과 절망에 떨고 있는 우리를 위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이 그야말로 긍휼로서 임하기만 애태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