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내려진 저주, 목사의 정체를 점점 포기하다
목사(牧師)라는 직함(職銜)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모 정당의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세상 정치의 한복판에서 해당 정당의 회생을 돕고자 분투한다. 아마 그 정치집단은 목사라는 이미지에 걸린 도덕성 내지 공정성을 국민들에게 선전하는 효과를 보려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이미지 선전을 하고 그곳에서 목사로서 공정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목사의 고유한 일에 충실하고 있느냐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성경을 펴고 성경 본문을 강론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다음에야 아무리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개신교 목사의 고유한 사명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한국 기독교 역사 130년 동안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목사들이 있다. 순교, 박해, 탄압, 고문 등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 민족의 고통을 앞장서서 온몸으로 받아낸 목회자들이 많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독재 정권과 싸우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목숨을 던졌던 분들도 많다. 그러나 또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며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3)’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전파라는 고유한 사명을 전제한 개념이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여호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벗어나서는 어떤 일도 성경적 사랑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자기 몸을 불사르는 살신성인에 대해 인간적인 동정이나 존경이야 당연지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개신교 목사의 본래 사명이냐는 더욱 엄격한 숙고를 요청한다.
성경 진리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사라지면서 우리 교계에서 목사의 정체성도 동시에 사라지고 있다. 개신교 교회에 소속해 ‘성경권위’에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하려는 목사는 점점 준다. 성경권위 회복이 주요 관심사가 아닌 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다. 목사 손에 관리되는 교회 재산이 수십 억대만 넘는다고 해도 성경 진리를 사수하는 일이 목사의 사명이 되기는 힘든 세태다. 다른 교회가 가진 재산을 부러워하며 언젠가는 성도들의 주머니가 자신에게 열리길 바라는 목사들의 경우에도 본래 사명과 정체성은 찾기 힘들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자가 목사라고 아는 성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목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는 성도들도 줄어든다. 도덕적으로 흠 없이 건전하고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정도라면 일반적으로 ‘건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목사의 정체성에 충실하다고 할 수는 없다. 목사에 해당하는 성경의 원어는 ‘포이멘’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양 떼를 잘 길러주고 보호하는 ‘목자’다. 즉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다하는 자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목사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요 10:11) 목자로 소개하신다. 자기 양의 범위는 그렇게 추상적이질 않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기록인 성경 진리를 듣고자 모인 자들에게 전하는 자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목사의 올바른 자기 노릇이다.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고 책임 있게 전하는 것이 목사의 유일한 사명이어야 한다. 이것을 다른 어떤 역할이나 직책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본래의 사명을 등한시하며 사회적으로 거창한 일들을 하면, 이는 성도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
목사는 자신도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단지 그리스도께 받은 진리선포의 은사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의 ‘목자와 감독 되시는’(벧전 2:25) 주 예수 그리스도께 성도를 안전하게 안내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목사는 공식적 칭호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을 보호하며 복음 진리를 전하는 일의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목사의 고유한 사명을 숙고할수록 한국 교회의 목사는 점점 더 자기 정체성을 잃어갈 것이라는 점이 틀렸으면 좋을 예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