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다른 두 눈물, 그리고 또 다른 피눈물
지난 3월 22일, 침몰 후 천 일을 훨씬 넘기고 세월호 시험 인양을 시작하던 날이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 상공에 노오란 세월호 추모 노란색 리본을 닮은 권운(卷雲)이 나타난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시작한 세월호 인양은 9일 후 3월 31일 오전 7시경 진도에서 반잠수식 선박에 실린 채 목포신항으로 출발했다. 같은 날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이며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서울 구치소에 구속당했다. 4월 9일 서울 구치소에 구속된 채 네 번째 검찰조사를 앞둔 그 날, 세월호는 침몰 후 1089일 만에 목포신항 철재 부두 위로 올라왔다.
두 사건을 너무 억지로 엮은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두 사건이 너무 선명하게 경험적 감각(感覺)의 통일성을 지배한다. 대통령 탄핵 사유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지만 두 재판관의 소견서에 적시(摘示)했듯이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의 직무 유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전직 대통령을 가두고 있는 구치소의 철창과 세월호 희생자 유골 및 유품 유실을 막고자 설치했던 철조망의 관련성을 인과관계로 엮으라는 통각(統覺) 작용이 또 일어난다.
이 밖에도 찾아내어 엮는다면 세월호 참사와 대통령 탄핵은 지난 몇 년 동안 함께 움직이는 한 덩어리의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펄에 묻힌 잔해처럼 얽히고설키어 있다. 세월호 인양을 늦추면서 국민들 기억에서 그 참사를 빨리 잊게 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한 간계는 더욱 많은 시민을 촛불 광장으로 내모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최고 통치자의 묵과할 수 없는 배임을 규탄하게 했고 탄핵을 향한 목소리를 점점 키웠다. 국민 앞에 진정한 참회의 마음으로 희생자 수습에 만전을 기할 기회를 놓치고 거듭거듭 자기 행적을 숨긴 결과 그 최고 통치자는 철창신세가 되었다.
수인(囚人) 번호 503번을 받고 자신이 들어갈 독방 앞에서 전직 대통령이 펑펑 울었던 그날, 세월호 실종자 가족도 힘겹게 육지로 향하는 처참한 세월호를 보고 그 안에 갇혀 있을 자식과 남편을 떠올리며 그들도 펑펑 울었다. 국민이 보기에 너무 다른 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믿었던 국가의 무책임한 배임에 대한 통한의 눈물과 자기 소유로 믿었던 국가 장악력 실패로 인한 원통한 눈물이 같이 흘렀던 그날이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처참하게 찢긴 세월호를 보고 또 다른 눈물을 더 비참하게 흘리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희생자 수 304명, 실종자 9명’은 더 이상 세월호 참사의 숫자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침몰하고 있거나 아니면 벌써 침몰하여 처참하게 훼손된 한국 교회라는 배다. 한때 구원의 방주 상징이기도 했던 ‘한국교회호’가 침몰한 지 이미 꽤 오랜 시간을 흘러간 것은 아닐까? 만약 침몰했다면, 이 배를 인양할 만한 회사는 지구상에 도무지 존재하지 않을 듯하다. 교회 부패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말이다. 이러한 생각이 결코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보이고 들리는 소식은 침몰에 가까운 소식뿐이다.
지난 3년간 침몰한 세월호와 함께 국민 모두가 흘린 눈물보다 더 심한 눈물이 성도인 우리 눈 앞을 가린다. 아직도 구원할 영혼이 많이 남아 있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야 완전히 침몰하는 시간이 늦추어지기 때문이다. 아직은 한국 교회에 영혼들을 구할 ‘골든 타임’이 남아 있기를 간곡한 눈물로 호소해 본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욕(私慾)을 채우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거짓 지도자들의 악행과 만행을 막아주시길 애원한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의로운 심판에 호소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노의 심판보다 더 애절한 것이 있다. 아직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 진리의 말씀을 듣고 돌아올 백성, 엘리야의 시대에 사악한 아합 왕과 간교한 왕비 이세벨의 칼날에서 하나님이 숨겨주신 칠천 명(왕상 19:18)과 같은 주의 백성들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