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 = 한국 교회 퇴락의 길?
한국 교회에 벌어지는 일은 점점 성경진리가 초토화하는 영적 특별 재난지역을 방불케 한다. 개혁파 교회의 성경권위 실종 가속화, 목사들의 속물적 정치꾼화, 거대한 교회 재산의 사유화와 세습몰이, 학벌 세탁과 조작 및 논문 표절의 철면피화, 소수 약자의 인권에 대한 성경적 대안의 난맥상(亂脈相), 교권 희생양인 성도의 불가역적 무지몽매함 등등, 이러한 불법의 아류들은 아직도 수백만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우리 한국 교회의 실정이다.
성도들이 어느 정도 규모의 교회당에서 출석하면서 교회 생활을 할 경우, 성도들의 관계는 서로 얽히고설키어 그저 좀 더 친근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이웃의 연장일 뿐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인 만큼 각자 자유롭게 믿으면서 악질 사기꾼과 같은 종교 지도자 정도만 아니면 충분하고, 자기 기준에 만족스럽지는 않은 면이 좀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 목사라고 하더라도 웬만하면 서로서로 용납해 주면서 살아간다. 목사의 설교 패턴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메시지 내용의 수준도 알고 있다. 가능한 한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그리고 각종 집안 대소사에 목사가 신경 써서 챙겨주고 전화해서 관심 가져주고 복 빌어주거나 위로해 주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 위로 주시는 말씀이라고 성경 한 부분 찾아 읽으며 함께 연민의 정을 나누는 정도가 되면 한국 교회에서는 만족지수가 어느 정도 나오는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방(尋訪)은 교인 관리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진리의 말씀을 차근차근 가르쳐주면서 진리 안에서 양육하고 돌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 지도 너무 오래다. 목사도 목회 성공과 재직 동안 안전하게 자신의 자리 보장을 위한 것에 연연하기에 성경교육에 별 관심이 없고, 성도도 목사가 자신을 멀리하지 않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가끔 정성어린(?) ‘안수’ 기도만 해주면서 목사의 치명적인 흠만 없으면 그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성도들도 목사가 성경 해석에 대해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스스로 알아서(?) 걸러 듣는 훈련이 잘 되어 있다.
한국 교회 생활에서 성경말씀 이해와 관련해 성도들이 진지하게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는 목사는 거의 없다. 나아가 주위의 일반 성도들도 편안하게 교회에 오고 가는 것을 좋아하지, 곤란한 질문으로 일상화된 신앙생활의 패턴을 흔들어 놓거나 불편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교회에 오고 가야 하며, 목사의 고유 업무는 도대체 무엇인지, 담임 목사가 어떤 종류의 신학을 공부했는지, 목사의 성경관이나 교회관은 무엇인지, 성경은 왜 하나님의 말씀인지 등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자를 오히려 색안경을 끼고 본다. 불만 세력으로 낙인찍거나 이단적 요소가 농후한 사람으로 분류한다. ‘성경 너무 알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한국 교회의 공공연한 불문율(不文律)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교회의 절대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다’라는 개혁파 교회의 대원리는 거의 실종되어 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고 다윗 왕가를 이탈해 북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 결국 앗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한 북이스라엘과 너무 흡사하다. 우리가 열왕기 전체를 읽다가 보면 줄곧 만나는 낱말이 하나 있다. 바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말이다. 북이스라엘 모든 왕들에게 붙어있는 수식어다. 북이스라엘 멸망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북쪽으로 가서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남쪽 유다 다윗 왕조를 괴롭히는 북이스라엘 모든 왕 앞에 붙어 있는 말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말이다. 여로보암왕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죽이고 남쪽 유다로 다시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우선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여호와라고 왜곡한다. 그리고 송아지 우상을 경배할 산당(山堂)을 짓는다. 또한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으며 유다의 절기와 비슷한 날짜를 정하여 산당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이탈한 결정적 증거들이고 이 길을 북이스라엘 왕들이 한결같이 따라갔으며 결국 멸망당하게 된다.
이러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행태는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와 너무도 닮았다. 교회가 없는 것도 아니며, 성경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성경교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성경 교육 환경이 열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우상화하여 신전(神殿)이 되어 있고 목사는 제사장으로 둔갑했고 임의로 절기를 만들어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금전을 요구하고 있다. 오직 성경권위가 그 원천인 개혁파 교회의 본질을 현재의 한국 교회를 통해 끌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중세 로마 가톨릭보다 더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아도 이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국 교회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깊이 들어서서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제국에게 멸망했고 바벨론 제국의 침략을 겪으며 초토화하고 페르시아 제국 초기에 남쪽 유다와 함께 ‘남은 자’로 일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그러한 회복이 우리 한국 교회에도 약속되어 있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