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종말, 신문의 죽음
40개국 중 신뢰도 4년 연속 꼴찌! 그 신뢰도에 대해 더 이상 평가 점수가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의 수치스러운 곳이 있다. 바로 한국 언론이다. 그런데 이 꼴찌 언론의 공장이 자리한 한국 사회에는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꼴찌인 사실을 상당수 언론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성은커녕 뻔뻔함의 극치를 보이면서 왜 꼴찌인지 점점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저러니 꼴찌 할 수밖에 없다는 증명을 점점 형편없는 내용 취재와 의도적 편집과 왜곡된 보도를 통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측은하기는 할 터인데,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대형 언론사가 언론 본연의 자기 사명을 다할 경우 사측이나 기자들에게는 득보다 실이 크기 때문이다. 생계와 출세의 목줄을 쥐고 있는 금권 권력인 광고주인 대기업들, 허세를 부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는 일부 검찰 권력을 비롯한 정치 권력들과 맺고 있는 연줄을 끊어야 신뢰도를 회복할 수 있는데, 언론이 권력의 맛을 보고 그 권력을 이용하여 그 본연의 임무는 폐기하고 사익 추구에 몰두하는 마당에 신문 사주들과 그 그늘에 있는 종업원에 불과한 기자들에게서 신뢰도 회복을 위한 기사 작성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 언론의 종말은 어느 누가 초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괴멸을 가속화한 면이 매우 크다. 그야말로 정보 유통 속도의 혁명적인 변환과 함께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급속한 발전으로 종이 신문의 역할이 줄어들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그것이 핑계가 될 수는 없다. 흔히 위기가 기회라는 말을 하면서 산다. 가령 언론이 종이신문으로 국민의 알권리를 독점하던 시절을 지나면서 새로운 정보 공유시대가 다가올 때 스스로 쇄신하여 사건 현장 속에서 편파 방송과 왜곡 보도 혹은 악의적 편집을 줄이고 국민들이 신뢰하는 뉴스를 만들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렇지 못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스마트폰에서는 개인 미디어까지 급성장하는 가운데 한국 언론의 구시대적 행태는 어떤 경우 개인 유튜버 뉴스보다 못한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스스로 신문의 폐지화를 앞당기는 이러한 모습은, 매년 세계도 경고했지만 여전히 올해도 ‘신뢰도 꼴찌 언론=한국 언론’이라는 오명과 수치를 자신 있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더럽혀진 언론의 명예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많은 언론들은 이제는 보도의 기본 양심까지 버린 지도 오래된 것 같다. 더욱더 악의적인 방법으로 나라와 국민을 시끄럽게 할 목표물을 정해 물고 뜯어 온갖 수치를 안겨주는 보도에 정말로 저질 매체의 극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행태가 마치 백주에 일어나는 강도질처럼 볼썽사나우며 점점 더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를 부추기는 더욱 나쁜 경우가 있다. 신문의 폐지화를 자초하는 불쌍한 언론에 대해 그 본연의 자세가 무엇인지 비판해야 할 일부 지식인들이 오히려 언론 종말을 부채질하는 저질 기사들 작성에 가세하는 상황이다. 이들은 자칭 나라의 엘리트 집단처럼 행동하며 어려운 용어나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데이터를 이용해 언론 종말에 기름을 붓고 있다. 참으로 비열하고 사악한 행태를 보이는 수구적 엘리트 집단들이다.
독립신문 창간 당시부터 오늘까지 이어지는 이 땅의 언론 역사를 상식 수준에서 볼 때도 신문의 자기 사명을 위해 정직한 기사 한 줄을 위해 탄압과 고문은 물론 목숨을 던진 위인들도 많다. 그래서 신문의 폐간화가 지속할수록 또한 그 이상의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동란,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5.16쿠데타, 5.18민주화운동까지, 한국 현대의 언론 역사에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참으로 정직하게 한 줄 한 줄 기사를 작성한 귀한 많은 기자들이 있다. 그래서 신문을 폐지화하는 언론들을 보면서도 비판에 앞서 통탄한 서글픔이 먼저 일기도 한다. 서구에 비하면 매우 짧은 언론의 역사를 겪는 우리의 언론치고는 신문의 역할이 무엇인지, 기자의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기자의 양심과 사명을 위해 분투했던 분들을 생각하면, 현재 기레기 혹은 기더기라는 오명이 씌워진 언론사와 기자들에 대해 마냥 비판과 비난을 쏟아낸다는 것도 결코 유쾌하지 않다. 생계를 위한 벌이와 생존의 발버둥은 모든 인간이 살아있다는 보편적 증거다. 하지만 자기 생존을 위해 만만한 자들을 선정해 왜곡하거나 부풀리는 기사를 통해 남의 불행을 짓밟고 자기 욕망을 실현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불량한 기자의 기사가 신문을 폐지로 만드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수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쓰나미처럼 몰려와 뒤덮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많은 사고와 사건들에 대한 소식은 우리의 심장에는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시는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슬프거나 답답하고 참담한 사건들이 왜 일어나야 하는가?’ ‘왜 공정한 보도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지 않으실까?’ 이러한 고민 속에 우리는 다시 성경진리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사고나 사건, 편파적이거나 왜곡된 기사들을 접하면서, 또다시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절대주권적 역사 섭리 앞에 모든 것을 던지거나 맡기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단지 심리적 자기 위로 차원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시고,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는 하나님’(사 45:7)의 존재에 의존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한다. 정확한 지식에 바탕을 둔 바른 보도뿐 아니라 왜곡된 지식에 매몰된 그릇된 신문 기사까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 아래 있음을 새기고 또 새긴다. 세태를 비판하면 할수록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무한하신 능력에 의존해야 할 뿐이다.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 29: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