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바른길을 가늠해 보다
지난 2019년 12월 24일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 자기 신문사의 마지막 칼럼을 작성하고 30년 직장과 작별했다. 동아일보에서 나올 수 없는 논지의 글이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신문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글이라는 데에도 많이 공감했다. 만약 다른 진보 관련 일간지에 그렇게 썼다면 그런가 보다 혹은 그래도 신문사 논설위원은 저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평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목을 받은 이유가 뭔가 특별한 내용이 있어서 그런가? 과거와 현재의 검찰 민낯이야 포털을 통해 뉴스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그 논설위원이 작성한 정보 정도는 특별한 취재 없이도 대부분 이미 잘 알려진 사건들이다. 그런데 왜 며칠 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가?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신문사에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에 드러난 검찰의 조작, 2013년 공무원 유우성 씨에 대한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증거 조작의 합작,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뇌물과 성접대 의혹의 봐주기 수사, 최근 룸살롱 접대 검사들의 희한한 셈법에 의한 불기소, 이명박 정권 당시 PD수첩 수사와 미네르바 사건을 통한 정권 보호 앞잡이 사건 등 모두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글이 왜 중견 언론인이 30년 직장을 그만둘 각오로 쓸 정도인가? 누구나 아는 일부 검찰의 부정과 부패, 모든 국가 기관의 대표들이 때로는 국민 앞에서, 사과의 시늉이라도 하듯 고개를 숙이는데, 수많은 국민의 직접적 가해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 숙여 형식적 사과 한 번 없는 집단의 뻔뻔함에 대해 바른말 한 번 한 것이 왜 직장을 접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지 참 이해하기 힘들다. 그 언론사가 검사들의 홍보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불법을 지적했다고 그 논설위원을 궁지로 몰아 직장을 떠나게 하는 것은 정치 검사의 홍보지 역할을 한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
신문의 소중한 가치를 고민하는 자라면 이러한 상황을 남의 일처럼 비웃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지면도 논설위원의 자격으로 사설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 신문의 쪽기사 하나를 목숨 걸고 쓴 기자들이 많다. 직장을 그만둘 정도가 아니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반병신이 될 정도로 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 글을 쓰는 기자들도 있었다. 그러한 자들과 앞의 논설위원은 비교할 대상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설위원은 왜 주목을 받았는지 생각할수록 이상한 느낌이 든다.
30년 좋은 직장을 더는 다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각오하고 그 신문에 그러한 글을 썼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격려를 보낸다. 어떤 진보 논객은 이 시대에 깨어있는 언론인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평(世評)들을 더 들여다보면 다음 같은 점으로 흘러가게 된다. 주력 신문사들은 좋은 회사임에 틀림없다. 머리를 좀 굴리면 국회의원이나 정치가로 출세할 수 있는 길도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신문사에 있는 동안은 반드시 조건이 있다. 신문사를 경영하는 사람들 즉 기자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제품과 같은 글을 만들어 줄 때 그 신분이 보장받는 것이 현실이다. 30년 직장을 더 다닐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회사의 엄격한 방침을 어겼기 때문일 것이다. 함부로 자판을 두드리지 말고 신중하게 신문사 경영 주체의 뜻하는 바를 헤아리고 그들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은 삼가고 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바를 대신 말해줘야 한다. 특히 사주(社主)나 기자가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경우는 가령 신문을 조직의 홍보용으로 쓰려고 계산하는 검찰일 때다. 이번 논설위원의 글 내용이 검찰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렇게 세간에 주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문사 경영 주체들의 눈에만 벗어나지 않으면 그야말로 꿈같은 직장인데, 그 단 한 가지를 어기거나 소홀히 하면 질 높은 삶의 규모는 모든 게 꼬여버린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꼬이도록 자청했다는 것에 사람들은 그 논설위원에게 큰 용기를 냈다고 격려를 해 준 것이다. 신문사야 그러한 논설위원 한 명쯤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문사를 불편하게 한 경우를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 신문사 조직에 더 확실하게 충성하는 자를 더 많은 연봉으로 선발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큰 이유가 되는 내용도 아닌 한 논설위원의 한 편의 글이 이렇게 성탄절 이브의 한 뉴스가 되는 이 사회, 도대체 신문이 뭔지 어떤 신문이 진짜 신문인지 고민하며 새해를 맞이하며 이 신문의 바른길을 더욱 고민한다.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