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내 ‘동성(同性) 지향성’으로 고통받는 지체를 위한 복음 더욱 절실
“하나님, 왜 저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시나요? 저는 지옥에 가나요? 이것은 언제나 마음에 작은 구멍을 파는 것처럼 고통을 줍니다. 제발 저를 지옥에 보내지 마세요. 제가 정말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저도 착해지고 싶어요. 저는 무언가 하기를 원하고 당신이 인정하는 그 무슨 표시가 필요해요. 만약 제가 당신의 인정을 받는다면 저는 행복할 것이에요. 인생은 너무 잔인하고 불공평해요.”
2009년 방영된 실화 바탕 영화 ‘바비를 위한 기도’(Prayers of Bobby)에 나오는 주인공 바비의 애타는 기도 내용이다. 바비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부모에게 알린 뒤 동성애를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실패하자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한국 교회 내에는 아직도 동성애에 대한 논쟁이 격하게 진행 중이다. 동성애와 관련해 통칭하는 개념은 주로 ‘LGBTQI’(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트랜스젠더, 퀴어, 간성)로 요약된다. 이른바 ‘이성애(異性愛)’가 다수의 보편성을 뜻하기 때문에 이들을 ‘성소수자’라고 부른다. 한국 교계에서는 지금 국회에서 입법 진행 중인 ‘성지향성’ 차별과 혐오 금지를 포함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 찬반 논쟁이 더욱 격해지면서 해결의 접점을 거의 찾지 못하고 있다. 통과되든 아니든 교계에 미칠 파장은 매우 크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 중에 가장 힘든 최대 피해자는 복음 진리의 자유를 설파하는 교회 내에서 남몰래 고민하며 고통스럽게 바비처럼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르는 지체일 것이다.
정치권과 국회에서 입법 검토 중인 그 법은 단지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의 기본권과 그 존엄성과 가치를 보호해 주는 것과 관련될 뿐이다. 국회가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동성 지향성을 갖는 지체가 신앙적으로 자유로워진다면, 이것은 스스로 구속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에 대한 영원한 대속주이시고 모든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엡 1:22) 되심을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처하게 할 것이다. 또한, 국회가 그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 지향성으로 고민하는 지체를 절망하게 만든다면 이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절대자유를 보장하는 영원한 통치자가 되심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에 처하는 태도가 될 것이다.
교계 내 논쟁은 국회 입법에 대한 찬반을 주장하기 이전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분명한 인간론과 구속론을 정립하고 세속적 입법보다 뛰어난 신학적인 명쾌한 답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목사나 신학자 신분으로 국회 앞에서 국회의원의 법안에 지지한다거나 반대하는 성명서 발표나 시위를 하는 것보다 신학적으로 이의 없는 교회 내 동성 지향성으로 고통받고 괴로워하거나 목숨을 포기하려는 지체를 위한 자유와 해방의 복음 진리를 우선 제시해야 할 것이며 그 ‘도피성’을 만드는 데 전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성경적 근거들은 빈약한 수준으로 보인다. 급선무는 자신의 주장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이러한 문제로 고통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에게 정말로 적합한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거나 혹은 가해자의 늪에서 허덕이는 자가 복음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어떤 주장이든 쉽게 논박당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그만큼 빈약하다는 방증이며 이러한 말씀으로는 다급한 자에게 손을 내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맥락과 전체 의미를 배제하고 자기주장을 단지 정당화하기 위한 부분만 인용한다고 해서 성경적 근거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성경권위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전제한 역사비평학적 접근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단지 구약을 이스라엘 역사로 치부하거나 혹은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 배경을 앞세워 절대진리 성경의 말씀을 상대화하는 태도도 바른 접근 방식이 아니다. 물론 문자주의도 경계할 대상이다. 구약에 나타난 구절을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유사한 경우에 적용하고 힘들어하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재차 단죄(斷罪)하거나 정죄(定罪)하여 도피할 수 없는 곳으로 몰아가는 태도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교회 내 지체들 중 ‘동성 지향성’ 문제로 고통에 처한 자들을 위한 성경적 인간론이나 죄론 그리고 기독론의 확고한 정립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고 본다. 절대진리의 자유와 해방의 복음인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 국회에서 입법되는 과정만을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태도는 우리 스스로 진리의 말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사분오열하고 있다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성경권위가 흔들리고 있는데 어떻게 성경적인 인간론과 죄론, 구원론이 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통해 자유의 길로 그 형제와 자매들을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주장이나 진영 논리를 잠시 접고 무엇보다 성경에서 이러한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필요한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데 전심전력해야 할 때로 보인다. 이제까지 그러한 노력을 한 면도 있지만 더욱 매진해야 할 분야로 보인다.
앞의 영화에 나왔던 내용을 다시 한번 유의해 보자. 아들 바비를 잃고 억지로 바비의 성적 지향을 바꾸려고만 했던 자신의 태도를 후회하는 어머니의 절규다. “바비는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약물을 복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게이인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동성애를 고쳐 주시길 희망했습니다. (……) 자라나는 자녀에게 스스로를 선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밖에 없는 약한 존재라고 믿으면서 자라나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죽을 때까지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이 무슨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입니까? (……) 아무 죄 없는 아이의 양심에 잘못된 죄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삶과 하나님과 자신을 왜곡시키고 그 결과로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게 한 것이 얼마나 타락한 것이었는지 나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만약 내 아들의 인생을 순수한 마음으로 봤더라면 나는 하나님의 눈에도 사랑스러운 영혼이었음을 깨달았을 텐데……”
동성애는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24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6 (……)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1-27 부분 인용)
하지만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사건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사역은 어떤 처지에 있는 자에게라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예외가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온다.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쳐야 한다. 예수께서 간음했던 여자를 데리고 온 자들과 모여온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물러간 이후에 그 여자에게 같은 범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죄를 지고 이 땅에 오신 구속주로 돌에 맞아 죽을 여인을 살려준 사역을 하신 것이다. 동성애를 부추기는 왜곡된 변명의 논리는 분명히 성경적으로 비판해야만 한다. 하지만 동성애자들 틈에서 자유와 해방의 손길을 보내는 지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위한 진리의 말씀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여 그 지체들의 관절과 골수에 사무치는 자유의 진리가 되도록 어느 때보다 더 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