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謝罪)와 용서, 멀고도 험한 길이라지만
지난 3월 21일 빛고을 광주에 의미심장한 일이 있었다. 1980년 5.18민주항쟁 당시 신군부 소속 공수부대 하사관 출신으로 당시 광주에서 군작전이라는 명목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저격했던 사람이 공개적으로 사죄하며 유가족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한 희생자 가족은 용서하면서 이제는 마음 편히 살아가시라고 위로해 준 일화가 있었다. 당시부터 40년이 훨씬 넘었다고 하지만 내 조국 대한민국의 군인한테 내 부모나 형제 혹은 자식이 민간인 신분으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참으로 용납하기 힘들다. 당시 같은 방식으로 희생을 당한 많은 유족들이 그동안 억지로 억누르며 참았을 울분이야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시절 비디오와 사진에서 보았던 광주 투입 공수부대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살상과 폭행 장면은 35년이 지나가도 아직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 만약 그렇게 광주시민 진압 현장에 투입되었던 계엄군 공수부대 출신을 면전에서 만난다면, 내 표정 관리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유족들에 대해 잠시라도 제 일처럼 여기고 자기 감정을 이입해 본다면 온몸의 응어리를 풀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당시 공수부대 출신으로, 아무리 군인의 책무라고 하더라도,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한 가해자의 처지로 생각해 본다고 하면 더더욱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없을 것 같다. 국가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현장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군인 신분이라는 특수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변명하면서도 또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뿐이지 유족에게 다가가는 어떤 행동을 감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진압 군인들도 이제는 대개 최소 회갑을 넘긴 세대들일 것이다.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되는 상황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 광주시민들을 사살한 당시 계엄군이었다면 지금의 내 심경과 삶의 표정은 어떠했을지 또한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는 생각이 전부다. 마냥 묻어둘 수도 없고 혹여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었다면 진실이 무엇인지 떳떳하게 밝혀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도 점점 커질 수 있다. 복잡하고 답답한 심경으로 아직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시 진압 계엄군으로 복무한 분들이 많을 텐데, 용기 내어 유족에게 무릎 꿇고 공개 사죄를 구하는 분들을 보면, 경우와 처지야 어떠하든, 그분들에 대해 위로와 함께 하늘 아래서 이제는 함께 잘 살아가자는 격려의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다.
지난 3월 21일 당시 민간인을 쐈던 5·18 계엄군의 사죄는 역사적으로 뜻깊은 의미가 있다. 가해자 자신이 직접 발포했다고 고백하고 그 총탄에 특정인이 분명히 숨졌으며 해당 유족에게 사죄를 구한 것은 이번이 첫 사례로 기록된다. 다른 동료들을 더욱 나쁜 군인으로 만들거나 전우들을 더욱 곤란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처사임에도 이렇게 희생자 유족의 아픔에 용서를 구한 것은 생각할수록 큰 응원을 보낼 일임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는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라고 했으며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았다”며 오열했다. 이러한 사과에 대해 고인의 형은 “늦게라도 사과해줘 고맙다”며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라고 하며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떳떳하게 마음 편히 살아달라”며 동생을 사살한 노병(老兵)을 안아줬다. 향후 당시 계엄군과 희생자 유가족 사이에 가능한 많은 사죄와 용서가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의 한 성도로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사실 죄의 고백과 ‘용서(容恕)’는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진리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백성 곧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어떠한 죄책(罪責)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속죄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반드시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한다. 죄의 깨달음 문제는 그야말로 깨닫게 하시는 주권과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인간적으로 보더라도 피해자에게 몹쓸 상처를 안긴 가해자가 피해자를 감동시키는 사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임이 틀림없다. 자기 손으로 죽인 사람의 형제 앞에서 사죄를 구하는 노병(老兵)의 오열이 그동안 사죄하고 싶었던 진심을 모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진정한 회개의 어려움과 동시에 진정한 회개의 고귀한 가치를 함께 떠올리게 한다. 죄에 대한 용서는 ‘덮어놓고 열닷 냥’ 방식으로 할 수는 없다. 죄의 용서는 (노병의 자기 고백처럼) 죄에 대한 철저하고 치밀한 (자기) 견책(譴責)을 동반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견책과 용서의 진정성과 가능성에 대해 성경은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한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