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 수 증가와 감소, 인간 중심적 이분법을 넘어서 봐야 한다
지난 9월 한국 교회 대형 교단들의 총회가 끝나면서 현재 한국 교회 교인에 대한 전반적 통계가 나왔다. 주요 교단 여섯 군데에서 나온 통계를 합산하면 2019년부터 2020년까지 40만 명이 줄었다. 근래 10년 동안 통계를 보면 176만 명이 감소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교인 수 감소의 폭으로 본다면 역대 최대 감소다.
조금 더 세밀한 감소 통계를 보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예장합동·배광식 총회장)에서 17만 3378명이 감소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예장통합·류영모 총회장)에서도 11만 4066명이 감소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예장고신·강학근 총회장)은 상대적으로 감소 수가 적었다. 1만 750명이 감소한 것으로 보고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김은경 총회장)는 7594명 감소했으며,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이철 감독회장)는 5만 6729명,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지형은 총회장)는 3만 741명 감소했다. 여섯 교단의 현재 교인 수는 703만 8298명이며 이는 전년 대비 39만 4618명이 감소했다. 비율로 보면 성장세는 -5.3%이며 기성이 -7.4%로 가장 많은 감소세를 보였다. 그다음으로 예장합동이 -6.8%, 예장통합은 -4.6%, 감리회가 -4.4%, 기장이 -3.6% 그리고 고신 -2.6% 감소세를 보였다. 같은 교단들 총 교인 수가 최고 정점에 달했던 10년 전 2011년의 880만 5053명과 비교하면 10년 동안 176만 6755명(20.1%)이 감소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쯤에서 교인의 증가와 감소에 대해 인간 중심적인 상식적 판단을 재고해야 한다. 교인 수가 증가하는 것은 좋은 사건이고, 그 수가 감소하는 것은 좋지 않은 사건이라는 이분법을 경계해야 한다. 경계의 목적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간의 상식적 판단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과연 교인 수는 증가만 좋은 것이고 감소는 좋지 않은 것인가? 교인 수의 증가가 헌금 증가와 직결되고 헌금 증가가 바로 목회 성공의 외적 증거라는 등식으로 보면 무조건 교인 수가 증가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러한 판단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뜻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는 없다.
예루살렘 재판 광장에 운집한 수많은 유대인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으며 그들의 큰 목소리가 이긴다.(눅 23:21,23) 즉 큰 무리가 이긴다. 하지만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유대인들의 뜻이 관철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진리를 이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숫자가 많은 경우가 더 심각한 범죄를 행한 결과가 된다. 하지만 당시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주위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수많은 군중이 모였던 상황(마 4:25)은 구약에서 언약한 메시아를 확증하는 사건이므로 함께 기뻐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순절 성경 강림 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유대인의 수가 남자만 오천(행 4:4)이라고 했는데, 이는 얼마 전 예수를 죽였던 같은 유대인들이라고 볼 때, 이 숫자가 많을수록 회개하고 복음을 맞이한 경우이므로 매우 기쁜 일이다. 숫자의 많음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증가하는 수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실 때 다수의 군중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수가 더 심각한 범죄를 자행할 뿐이다.
수의 감소에 대해서도 인간의 상식적 판단을 삼가야 한다. 성령 강림 당시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인들에 의한 큰 환난과 핍박이 이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도 외에는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다.(행 8:1) 그야말로 예루살렘 교인들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그런데 환란과 핍박에 의한 예루살렘 교인 수의 감소가 나쁜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승천 전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주권적 방법이 바로 예루살렘 교인들을 흩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사도밖에 남지 않는 것은 나쁜 상황만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구약의 여호수아에 보면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산지와 남방, 평지와 경사지 그리고 일대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이었다.(수 10:40) 현대의 보편적 인류애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가나안의 진멸은 오래전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다. 진멸당한 원주민의 심정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원한과 분노와 증오심이 전부이겠지만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엄중한 섭리 과정이다. 그런데 수의 감소는 이방인에게만 해당한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야 당시 남유다가 망한 후 애굽으로 도망했던 자들을 여호와 하나님은 모두 진멸한다. 유다 백성 중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까지 멸절하신다.(렘 44:7) 여호와 하나님은 이미 애굽에 도망가더라도 모두 죽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유다 백성을 남기지 않고 멸절하는 것이 정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된다.
이와 같이 교인 수가 감소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고 교인 수가 증가하는 것은 기쁜 소식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에 대해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이 은혜로 깨닫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사건의 본질이다. 많은 수가 모이면 하나님이 기뻐하고 적은 수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판단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경우 현재 전쟁이나 고난이나 환란이나 핍박이 아닌 상황이며, 교인의 감소가 성경진리를 깨닫는 자의 감소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진리를 듣게도 하시고 듣지 못하게 하시는 주관자는 오직 긍휼과 자비, 진노와 심판을 모두 섭리하시는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 눈과 귀로 보고 듣는 대로 함부로 평가하는 것도 삼가야 할 것이다. 광야 40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처럼 한국 교회에 오늘도 하늘에 속한 영생의 말씀을 주시길 두려운 마음으로 간구한다. 교회의 최후 승리는 분명한 약속이며 이는 지상에 일어나는 사건을 초월해서 이미 확정된 바다. 그 영원한 천국에 준비된 하나님의 충만한 백성이 존재하는 것은 엄격한 불변의 진리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8): 그[여호와 하나님]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 2:4);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회복할 이스라엘 백성들-필자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호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