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신학 교육 정상화의 유일한 대안: 성경 연구 과정 중심으로 재편
1. 신학 교육의 본질은 대가(代價) 없는 성경 교육이어야 한다.
교회 교육의 주체는 성도가 아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성도들을 이 땅에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신다. 그러한 자녀들을 보혜사 성령께서 주관하면서 상호 소통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호 합력하며 살아가는 방식 중에 가장 중요한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진리를 전하고 전달받는 방식이다. 진리를 보관하여 전하는 자인 교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제자 사이의 영적 사귐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성경 진리를 매개로 하는 기독교 신앙 교육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을 때 신학 교육의 정체성 확립이 가능하다.
성경 교육 기관인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모든 성도가 형제이며, 누가 누구에게 어떤 특권을 가지고 명령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단지 먼저 복음을 접한 자가 성경 진리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뿐이다. 그러므로 몇 시간 가르쳐 줄 것이므로 얼마를 요구하는 것은 동생한테 공부시켜 주면서 수업료를 내라는 꼴이 된다. 성경 교육에서 돈을 주고받는 계약 관계를 제도로 만든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돈으로 거래하는 것과 같다. 사도행전 8절 18절에 보면, 거짓 제자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표적을 행하는 능력을 사려고 했던 사건이 나온다. 그릇된 신학 교육의 행태를 지적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명하신 바가 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그리고 성경 계시의 마지막 부분 요한계시록의 결론에서도 이러한 점을 강조한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성경 교육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성경 교육도 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은 신학 이론을 가르치며 정해진 금액으로 학위증을 주고받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멀다.
2. 성경 전체의 강론을 교육할 수 없는 신학 교육은 정당성이 없다.
현대 개신교의 참담함은 교회 아닌 교회 즉 교회가 성경을 점점 멀리하는 집단으로 변질한다는 데 있다. 이는 교회의 성경 교사를 배출하는 신학교에서부터 큰 문제가 있다. 성경 자체의 권위를 확정하기보다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의 이론에 기초한 신조나 교리를 신학 교육의 필수 과목과 논문 제목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학 과목은 대표적인 철학적 이론 중심의 과목이다. 철학 이론으로 뒤범벅된 기독교 윤리 이론으로는 성도들의 삶을 성경 중심적으로 안내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런가 하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계시론은 지금도 계시 체험이 직접 가능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호한 입장이다. 이 모든 것은 성경 자체의 신적 권위를 연구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며 신학 교육의 본질을 저해하는 폐해다.
신학 논의의 근간인 기독교의 많은 교리들은 반드시 성경에 근거를 둬야 한다. 성경에 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믿음이 가능하며, 이 믿음을 고백하는 조항들이 보편적 신조(信條)가 되며, 신조를 교리로 체계화하면 교의신학이 수립된다. 그런데 문제는 체계화한 교의신학이 얼마나 포괄적으로 성경의 근본 주제인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뒷받침할 수 있느냐이다. 이처럼 신학 이론과 체계의 건전성 여부는 성경권위 확증 여부가 결정한다.
성경 진리의 절대적 권위 확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확증과 직결하는 문제다. 성경 진리에 대한 확신 없는 신학이든 신앙이든 모두 허구다. 한국 교회는 교회 설립 초기부터 이단에 노출되어 있었다. 작금에도 이단들에 의한 혼란과 파탄을 겪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단들의 접근은 항상 성경에 대한 의도적 왜곡을 통해 일어난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성경에 무지한 수많은 한국 교회 성도들은 성경 몇 구절의 잘못된 해석에 유혹당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이단의 늪에 빠진다. 성경 전체를 논리적으로 일관된 진리 체계로 확증해야 하며 그래야 구조적으로 통일된 절대 진리임을 확증할 수 있다.
3. 교회 교사는 오직 동등한 지체로서 성경 교사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교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확증하도록 안내하는 봉사자다. 성경 진리의 보존과 전승은 교회 교사의 유일한 사명이다. 하지만 현재 교회 교사로 자처하는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을 여러 가지 목회 방법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이른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회법(정관이나 노회법이나 총회법)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 교사의 고유한 직무는 유기한 채 세상의 특권층처럼 스스로 귀족화하며 자신의 본분을 내던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교인들이 무지하거나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점 또한 이 문제를 쉽사리 극복할 수 없다는 인간적 우려도 앞선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에게 그 지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이건 간에 교회 내에서 특수한 지배 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항상 지배할 수 있는 계층과 항상 지배받는 계층이란 교회 관계에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주 예수께서 자신의 온몸을 자기 백성을 위해 전부 내어준 절대적 사랑과 그 사랑의 힘이 감동시킨 절대적 은총이 지배한다. 인간들이 만든 법적 조항에 근거해서 목사는 성경 강도권(講道權)과 교인 치리권 및 인사권을 비롯해 교회 연보 결정의 재정권까지 모두 지배한다. 마치 종교개혁 이전 중세 로마가톨릭의 이층 교회관을 답습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교회의 특정한 지배층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해당 총회 및 기타 신학교들은 거액의 경비를 받고 수업 내용이 무엇이든 큰 상관없이 필수 과정 3년 정도를 마치면 ‘자격증’을 나누어준다. 성도들도 목회자가 어떤 성경관과 어떤 신학을 배웠고, 또한 현재 연구하여 지키고자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보다 소위 명문대와 명문 신학교를 나왔느냐, 국내 박사냐 유학 박사냐 등을 먼저 본다. 이러한 성도들의 시각으로는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의 지배 구조의 악순환은 극복할 수 없다. 그리고 대학, 대학원, 석사, 박사, 해외 유학 등 막대한 경비를 지출한 지도자의 경우에는 인간적으로 볼 때 그렇게 고생한 것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교회 내 귀족화와 특권화의 과정은 중세에 일어났던 특정 계급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누리고자 자행했던 매관매직의 폐해로 이어질 것이다. 성경권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미숙한 성도들은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학벌에 주눅 들고 목회자의 권위에 압도당하면서 목회자의 귀족화는 더욱 견고해진다. 참으로 우울하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교육밖에 다른 길이 없다. 교회의 유일한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무조건 암송한다고 저절로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섬기기만 하거나 무조건 섬김만 받는 은사나 직책은 없다.
4. 교회는 오직 성경 진리가 선포되는 곳일 때만 의미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주어진 현실을 언제나 자기 편리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관습으로 굳어진다. 교회 내에도 이러한 인간 본성은 동일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특히 신학 교육을 보면 세속의 관습이 지배하고 있다. 정상적인 교육의 기준이 성경이 아닌 바로 인본주의가 지배한다. 교육의 주체, 교육 대상, 교육 장소 그리고 교육 기간 등이 모두 세속적 제도와 다를 바가 없다. 성경에 근거한 바른 신학 교육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세속 교육을 평가하는 잣대로 교회 교육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속 교육이 이권에 따라 움직이고 있듯이, 신학교 운영도 사적 욕구와 이익 충족을 위해 사립 재단보다 더 더러운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쯤이면 신학교 상황은 성경 진리를 지키고 전파하고 전수하고자 하는 사명과는 거의 무관하게 된다. 이권(利權)을 위해 교권을 동원하고 거기에다 정치적 권력까지 사적으로 사용하는 일도 빈번한 것으로 보면, 신학교육에 관습화된 제도는 청산해야 할 분명한 적폐다. 폐쇄된 종교 체제나 제도 안에 있는 현행 신학 교육으로 성경권위 중심의 신학 교육을 현실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성경 교육과 관련해서 교회에서 고착화한 폐습은 주일에는 오직 특정한 담임 목사만 성전이라 불리는 곳에서 일명 ‘대예배 시간’을 홀로 독점한다. 강단 독점도 문제지만 전달하는 내용이 성경적이건 비성경적이건 상관없이 교인들은 그것을 듣고 있어야 한다. 이의 제기를 했을 때 목사의 메시지가 고쳐지기보다는 이의 제기를 한 사람이 치리를 받거나 그 교회를 떠나도록 교회 정관이나 노회법이 목사를 보호한다. 이러한 제도 아래에서는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할수록 자율적인 성장보다는 타성에 길들여지는 종교적 노예로 전락할 뿐이다. 많은 부조리와 불법이 눈에 보여도 몸과 마음만 피곤해지기 때문에 교회 출석의 연수가 더해질수록 포기하면서 그야말로 수동적으로 종교집단의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진리의 자유함이 신자의 바탕이 되기는커녕 점점 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큰 교회라면 목사마다 서로 다른 성경관을 가지고 설교할 경우 성도들의 영혼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다. 성도로서 성경 진리를 깨닫는 기쁨은커녕 몸과 영혼은 영적 만족 없이 강요당한 봉사와 헌금으로 인해 피폐한 나날을 보낸다. 말이 좋아 충성과 봉사이지 교인들은 혹세무민 당한다. 목사의 저급한 설교에 대해서도 습관적으로 ‘아멘’이라고 하는 저 답답한 광경은 참으로 비참할 뿐이다.
5. 신학교의 제도는 성경권위를 확정하고 이를 뒷받침할 때만 유의미하다.
가정 교회에서 시작하는 성경 교육, 교회의 성경 교육 그리고 신학교의 성경 교육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처음도 성경이고 마지막도 성경이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절대 진리의 말씀으로 확증해야 한다. 기존의 신학 과목들은 아무리 유의미하다고 하더라도 성경 자체의 절대적 권위를 결코 능가할 수 없다. 올바른 신학 교수의 평가 척도는 학벌도 출신도 아니다.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 진리로 확증할 수 있느냐가 유일한 평가 기준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을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하나님 여호와 존재 확증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어떠한 사건도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으로 연관 지어 안내해야 한다. 성경의 수천 가지 다양한 내용들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 기록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학 교육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야 한다고 할 때 이는 성경 권위 속에서 모든 신학적 문제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통상 구분하는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관련 모든 지식들은 성경에 토대를 두고 해명되어야 한다. 일반 교육에서도 그렇듯이 신학교육에서도 교사의 자율성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 자율성이 성경 진리에 반대되는 것을 마음대로 가르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교사의 자율성은 무한히 보장해야 하지만 신학 교육에서의 자율성은 성경의 절대 진리 아래서만 정당한 것이다.
성경 권위는 성경 자체의 신적 권위로 지켜지는 것이지 인간이 수호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종과 신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진리가 선포되는 곳은 그곳이 바로 성경 권위가 선포되는 곳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가 계시되는 것이다. 신학교 테두리 안에 들어가야, 교회에 나가야 하나님을 배우고 만난다는 생각은 유치한 발상이다. 궁궐 같이 호화롭게 치장한 ‘성전’이라 곳에서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신약의 교회와는 무관하다. 성경은 인위적인 교육 제도를 만들어 정치적으로 규제를 가하며 통제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지 않는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의 교통하심에 따라 은사를 받은 자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서 타인을 가르치는 교사로 사용하신다. 그리고 어떤 대상이나 또는 시대 상황 및 여건에 따라 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신다.
사도 바울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모두 섭렵한 당대의 대단한 석학이었다. 하나님께서 제도 교육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가의 대표적 예다. 성경 강론은 물론이고 성경 계시 기록자인 그로부터 현행 잘못된 성경 교육의 대안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지식을 해로 여긴 이유가 있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었다. 성경 교사는 순수한 성경 진리의 전달자이어야 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의 폐습에 따른 직업인이 아닌 사명자로 말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선배 교사로부터 순수하게 성경을 배운 제자가 다시 교사가 되어 다른 자를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 옳다. 교회의 성경 교사는 단지 교회의 유일한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 뿐이다. 위기에 처한 현대 개신교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살길이 없다. 성경 교사인 목사들은 독점하고 있는 강단권을 속히 포기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 성경 어디에도 교사인 목사만 성경을 가르치는 강단권을 부여한 사실이 없다. 소위 주일 대예배나 찬양예배 또는 수요기도회 및 구역예배 그리고 금요철야기도회나 새벽기도회 등 모든 모임은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부 모임으로 대체하는 것이 옳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배윤리 권사 (교회동역자협회 / 객원기자) |
신학 교육 정상화를 위한 교육과정 제안: 성경 전문가 양성과정으로서 목회학 |
신학교육의 개혁과 대안을 중심으로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