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흑인으로 태어나 온갖 수모와 천대를 감수하면서 살아온 한 노인이, 박사가 되어서 돌아온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오늘을 위해 그동안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밤잠도 못 자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 그 뒤의 결과는 아들이 방자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우기고 나선다.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한 그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아버지는 분노하게 된다. 그런데 그 아들의 반응은 아버지의 그 같은 고생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일 뿐이며, 자식의 성공으로 보상은 끝난 것이라고 논리를 편다. 아버지는 코가 빠져서 얼음판 위에 넘어진 황소처럼 놀란 눈을 하고서 아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제 자식 사랑만은 무조건적이라고 여기는 부모들에게 처절한 통곡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여하튼 인간은 절대자 앞에서 왜소하고 볼품없는 개미나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부모는 무의식 속에 숨 쉬고 있는 또 하나의 끈으로 인연도 현실도 절단할 수 없는 천륜일 터인데, 피를 나눈 부자 간의 대화는 상대적인 사랑의 실체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에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기대치만큼 실망도 크는 법, 지혜가 없는 결과일 수밖에, 모르긴 해도 하루살이나 개미의 눈으로나 인간을 신처럼 위대하다고 할는지. 참으로 세상은 갈수록 수명이 연장되고, 편리한 생활에 볼거리도 많아져 그야말로 세상 사는 재미는 하루 한 시가 신나는 달밤 그것이다. 그냥 그렇게만 살아도 좋으련만 서로 물고 뜯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세상에서 존재적 인식은 따져갈수록 쓸쓸하고 초라하다. 고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삼 인생이란 영원하지도 않은 칠팔십 평생이 얼마나 부질없는 드라마 같은가를 생각하게 했다. 인생,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눈물로 지새워야 하는 걸까. 버려진 늪지를 보는 것처럼 어쩐지 온종일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상대에게 얹혀있는 세상은 본능적인 뜨거움에 끓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불만과 공허,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정한 뜻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혜 없이 겁도 없이 질주한다. 때로는 명예를, 때로는 부를, 때로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 나선다. 멋도 모르고 나름대로 자기 틀 속에서 삶을 윤택하게 해 보려고 애쓴다. 아니 내 자랑거리 만들기에 바쁘다. 그때마다 한계의 벽에 부딪히기 일쑤다. 끝내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지지 못할 좌절 속에서 허덕이는 인간의 무능력. 일찍이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여호와의 속성 중에 하나인 영원성을 찬양한다. 그의 행사가 영원한 것을 설명해주고 마지막으로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한다. “청년들이여! 네 젊음을 기뻐하고 청년의 때에 네 마음을 기뻐하여라 네가 가고 싶은 데 가고, 눈이 원하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을 알라” 진정 가치 있는 영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여호와를 모른다면 허무한 인생이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지혜를 주관하시고 그의 권능의 능력으로 범사 하나님 뜻대로, 오직 여호와 이름을 위하여 섭리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평안은 기대할 수 없고, 흑인 부자 간의 관계와 무엇이 다르랴.
우주 만사에 대한 진리, 깨달아야 될 전도서의 영원을 깨닫지 못한 데서 세상은 암담해진다. 참 심도 있게 공감을 일으키는 영원한 진리. 삶의 현장에서 사실로 하나하나 나타날 때에 참 통쾌하고 놀랍다. 그래서 더한층 믿음이 굳어지고 확신이 온다. 인생은 모든 것을 작정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행사를 배제했을 경우에 허무해진다. 자기 존재 확립이 긍정되어지고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확실히 깨달아 살아가는 그런 삶의 진리가 기독교 진리다. 영원을 전제하지 아니한 시간 세계의 행사라고 한다면 인생은 헛된 것에 불가하다. 그래서 현재가 매우 중요하다. 만족이 없는 것은 현재를 놓치는 것이다. 오늘 나에게 주신 삶의 터전과 환경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야 만족함이 있고 감사하다. 만족한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솔로몬은 부와 영화, 권력, 모자라는 것이 없는데 그 자체로 만족을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를 즐겁게 해볼까? 그것이 솔로몬의 연구주제였다. 정말 여호와 경외하는 걸 못 깨닫게 되면 어리석게 행했던 솔로몬의 그 길을 누구나 가게 된다. 그런데 솔로몬은 쾌락을 위해서 살았는데 괴롭더라는 말이다. 괴롭다면 결국 사는 게 헛된 것이 아닌가. 사는 방향이 확실하지 아니하면 허무하다.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때가 있고 역사가 있다. 근거는 성경에 있다. 그 확인은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오직 은혜로 깨닫게 하는 영원한 진리, 하나님의 선물, 그 영원한 사랑을 누가 알았으랴. 생각하면 할수록 큰 축복이고 전도서를 읽을 때마다 만족해야 된다는 깨달음의 감동이 밀려온다. 혼돈과 부대낌에서 벗어나 참된 가치와 그 의미를 부여하는 말씀, 이 벅찬 영혼을 적시는 말씀이 항상 내 가슴에 살아 움직이는 삶, 범사 여호와 인정하고 감사하며 그를 찬양하는 지혜와 슬기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착각에 빠지지 않게, 신선하고 그러면서도 해맑은 아침이슬 머금은 해바라기로, 어둠이 없는 나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망을 담아본다.
누가 뭐래도 터무니없는 물질의 풍요는 나태함에 젖게 되고,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마취의 삶이 아닌가. 자칫 받은 바 은혜를 족한 줄 모르고 오늘 감사와 만족이 없다면 내일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이 그 많은 부를 가졌지만 만족하던가. 정말이지 어떤 상황에서도 지치거나 낙심하는 기색 없이 늘 푸른 생명의 빛으로 그 영원한 사랑에 취해 주를 닮아가는 충만감으로 나아가고 싶다. 지혜를 주관하시고, 범사 하나님 정하신 뜻대로, 여호와의 권능의 능력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섭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도록 지혜와 총명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세월의 흐름은 망각과 상실의 흐름이다. 젊음을 잃어가고 우정을 잃어가고 진실을 잃어간다. 그 이름 그 사람 그 시절 그 웃음을 잃어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규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영원히 기억할 이름 ‘여호와’ 여호와를 알고 그를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된 복이다. 여기저기 바라보아도 보잘 것 없다. 영원한 사랑의 포로 되어 ‘오직 여호와만’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