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최후
모세의 최후가 요즈음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지난날의 역사를 회고하며, 계명, 규례, 율례에 대한 교훈을 비롯하여, 약속과 권고로,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유언의 말씀을 듣다 보면 답답함이 풀린다. 내 인생 여정에 대한 한숨도 사라지고, 세상사 쓴맛 단맛 다 들이키게 하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 살아계심이 믿어지며 경외할 마음도 생긴다. 고통을 떼어내려 버르적대는 작태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가도 반성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왔던 곳을 향해 돌아가기 위한 몸짓, 아픈 자에게는 더 아픈 자가 위로가 되듯이 모세의 고난의 역사를 확인하다 보면 어느새 신열이 가라앉는다.
백성에게 재교육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애굽 신을 섬기면서 사백 년을 살다가, 광야 사십 년 동안에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공부시켜 놓고서, 이젠 어깻죽지 무겁게 짓누르던 낡은 옷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날을 기다리는 것일까. 모세는 요단강 건너편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다. 저 땅이 약속의 땅이니 이제 건너갈 것이라고 한다. 거기 들어가거들랑 여호와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라고 모세는 신신당부를 한다. 그리고 가나안땅 들어가서 언약대로 잘 먹고 잘 살고 평안할 때 백성들이 부를 노래도 가르쳐준다, 그런데 풍요로워지면 이 부를 내가 얻었고 내 손으로 성공했다고 할 것이라는 말씀대로 여호와 잊어버리고 고개가 뻣뻣해지는 백성들, 광야 생활을 모르는 세대들이 말씀을 거역할 것을 언약한 대로, 사사시대에 그대로 이루어진다. 말씀을 거역하면 이방에게 맡긴다더니 정말 불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았구나. ‘과연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노래다.
세월이 지나가고 또 지나갈수록 감동을 줄 수 있는 노래가 어디 있을까. 모세는 과거 역사를 바르게 해석해주고, 오늘을 직시하며, 내일을 힘 있게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설명해주고 깨닫도록 가르쳐준다.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는다 하여도 나를 지도하는 자가 없으면 깨달을 수 없다. 성경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절대로 배제될 수 없다. 역사는 사실이다. 필연코 사필귀정,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언약의 땅을 보이며 못 건너간다고 하신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배턴을 넘기게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좋은 배경, 뛰어난 능력까지 부여받아 순풍에 돛단 듯 만사형통인 삶을 살게 했다 할지라도, 그러나 모세는 장거리 경주를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야 한다. 모세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백성들에게 무엇이 삶의 가치인가를 가르친다.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고 경외하며 살라고 권고한다.
뜬구름이 산허리에 감겨있고, 고요한 산안개가 산기슭을 입맞춤하며, 요단강 건너편의 갈멜산을 앞에 두고 모세는 지난날을 회고한다. 가느다란 미풍은 그의 옷자락을 하염없이 휘저었을 것이고, 그의 백발은 산바람에 사정없이 휘날렸을 것이다. 나그네 인생길, 광야의 길은 실로 끝없는 사막의 길이었다.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한 몸에 받으며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모세는 지금 느보산 꼭대기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천사가 내려와 모세의 임종을 수습한다. 그는 요단강을 얼마나 건너고 싶었을까. 모세의 일생을 보면 왕궁에서 40년을 살고, 망명생활 40년, 그리고 광야에서 백성들하고 40년을 죽을 고생을 하고 살았다. 그렇게 120년을 살았다. 이제 요단강 건너가서 맛있는 과일도 먹어보고, 농사도 지어보고, 양들도 길러보고, 백성들이 풍요롭게 사는 모습도 바라보고 싶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못 건너가게 하셨다. 그것은 모세는 율법의 대표로서, 율법으로는 하나님나라에 절대 못 들어간다는 뜻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진 진리를 모세의 경우를 통해서 가르쳐 준다. 모세는 말씀대로 모압땅에서 죽어 그 땅 골짜기에 장사 되었다. 마찬가지다 모든 육체는 이 땅의 흙으로 다 돌아간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 결국, 여호와께서 모세를 위대하게 하셨음을 회고하는 내용으로 신명기를 마무리 한다.
이 세상이 끝이라면 얼마나 가련한 인생인가. 그러나 역사의 강줄기는 지금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 움직인다. 어차피 모든 역사는 하나님 뜻대로 된다. 모세는 율법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가르치고, 신약교회 성도에게는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그리스도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가르친다. 바울의 신앙고백처럼 나를 낮추면 조용히 낮아지고, 하나님이 높여주면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말씀을 공부하는 삶의 원칙이고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어쩌다가 나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이 되게 했는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살게 하셔서, 때로는 절망을 경험케도 하고 때로는 내 수단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과거의 나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몰라서, 삶이 지치고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얼마나 가슴 치며 살았던가.
그 시절, 나는 별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는 바닷가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며, 요모조모 무거운 짐 홀홀히 벗어던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윗덩어리처럼 나를 짓눌렀던 그 고통의 무게들로 가녀린 육신은 망가져 내렸고,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고 부대끼며 온몸은 기진맥진이었다. 섬에서 사춘기를 보내고, 내 나이 스무 살이 되어 육지로 나왔다. 어디서 삶의 뿌리를 내렸건 두근거림은 마침내 울음으로 바뀌고, 속울음을 삼키며 바라본 밤하늘엔 별들마저 아스라이 멀어 보였다. 고된 일은 내 몫인 줄만 알았고, 결혼하고 어른이 되면 키가 멈추듯 고달픔도 멎는 줄 알았다. 그러나 기댈 곳 없는 삶의 덧없음과 허망함은 끝나지 않았다. 그이는 투병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도 갓도 없는 수렁에서 움츠려 지내는 날들도 많았다. 그러나 혈육을 지켜야 한다는 모성애 하나 등댓불 삼아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진리 하나 보듬어 안게 하려는 것이었다. 창세전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택한 백성으로 예정하셔서 당신의 주권적 능력을 인정하고, 참된 신앙인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속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산다는 것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일, 이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진리와 총명 흐려지지 않게 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 살아계심의 확증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를 알고, 오늘도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아예 밑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 있으니 위험도 염려할 것도 없다. 진리의 자유함 속에서 얼마나 속 편하고 홀가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