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가는 인생
신문에 난 기사 한 토막이 생각났다. 파산된 자기 가정을 위하여 온갖 희생을 다 치른 할머니는 어느 날 아침, 뜻하지 않게 뇌출혈로 정신을 잃었다. 처음엔 정성을 다해 간호했지만 장기간 치다꺼리에 지친 가족들은 그만 짜증이 날 대로 나고 만다. 결국 그는 차츰차츰 외면당하게 된다. 그가 치른 희생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부모에게는 열 자식도 짐이 아니지만, 자식들은 어디 그런가.
요즘 세상은 자꾸 사나워지고, 무서워지고 있다. 자식 농사가 부모의 노후를 보장하던 시대는 옛말이 되었다. 형제간의 갈등도 부모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인생의 조각조각을 들여다보면 상처투성이로 곪고 피가 괴어 생채기가 난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그러나 어떻게 하리. 절대로 하나님의 작정 프로그램을 뛰어넘을 수도 없고, 인생의 가는 길은 지름길이 없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 응어리는 풀 수 없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 수 없고, 진리를 깨닫지 않고는 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알 수 없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성경신학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행복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깨닫고 그를 경외하며 살아가게 하는 삶이 얼마나 큰 복인가.
세상은 다 각자 자기 좋은 대로 살고 있다.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식에게 효성을 가르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부모 중심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애쓰는 자녀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고귀한 진리를 깨닫고 사는 것, 그런데 말씀은 뜬구름이고, 관심은 창 너머 돈뭉치다. 성경을 공부하며 마음 토로하는 일은 드물다.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알았다면, 자식들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이상의 자식 사랑은 없는데, 나는 무엇에 대하여 고심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공급받고, 은혜 중에 은혜임을 깨닫게 되면, 진리를 가르쳐 준 부모가 한없이 고마울 것 아닌가. 여호와 경외하며 살다가 보니까 평안이 오고, 기쁨이 있고, 삶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발견되고, 그러다 보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효심으로 나타날 수밖에, 그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는가. 그렇지만 다 하나님 능력으로 주관해 가지 않는가.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선과 악, 위선과 진실, 순수와 과장, 현실과 이상, 양심과 욕심, 그런 두 마음을 가졌기에 자기와의 싸움, 나와 상대방과의 갈등적인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갈등이란 곧 고뇌를 유발하는 가장 원초적인 요소요, 삶에 있어서 배출되는 욕구의 하수물이다. 살아간다는 시점에서 야기되는 갈등 해소, 문제 해결은 절대 내 능력과 재주로는 불가능하다. 성경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배우게 하는 가슴에 무한한 평강과 감사가 있게 하고, 논리적인 사고가 주어져, 고통을 참고 견딜 힘이 생긴다. 문제 해결의 귀결점을 저절로 하나님 뜻을 따라 얻게 되고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풍부한 마음과 여유가 있는 마음을 길러준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을 주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어 움직이게 된다.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경외하며 섬기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지금 나를 살려 두는 것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더욱이 노년기는 무엇보다도 신앙에 대한 확실한 가치관이 필요하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하나님 말씀, 성경이다. 성경이 아니고는 이 세상에 해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신앙은 교리가 아니고 진리이다. 경험을 통해서도 그렇고, 성경을 보아서도 그렇다. 일상 속에서 소소한 기쁨을 찾게 되고 깊은 감동을 주어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보물이다. 다시 생각해 본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깨닫고 살아가게 하는 삶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인간이 산다는 것은 별것 아니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휴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매일의 생활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다가 한 줌 흙으로 되돌아가는 인생이다. 솔로몬은 인생을 살아보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계획에 의하여 섭리되어지고 그 하나님을 알고 깨달아 경외하는 것이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성경을 통하여 분명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면 허무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삶에 밀어닥친 뜻하지 않는 고난이 나를 깨닫게 하려는 채찍이었다면 콧등 시큰한 은혜이요, 자비하신 하나님 손길이다.
왜 갑자기 그 처참한 할머니의 삶을 떠올리게 했을까. 누구에게나 죽을 고비는 있다. 몇 년 전, 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자식의 보증 문제로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해야 했고, 온 재산은 경매 딱지가 붙여지고,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처분했지만, 길거리에 나 앉을 뻔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명만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다.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했듯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라”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형통하고 평안할 때에만 나타나는 감정표현이지만, 하나님 말씀, 성경은 나에게 엄청난 힘을 공급해 주었고, 슬픔과 절망과 좌절에 빠졌던 나에게 사랑을 덧입게 하셔서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은혜의 감격을 담아주셨다.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인생이 고달프다고 말들 하지만 모든 것이 욕심에서 비롯된다. 때가 되면 모든 것 다 놓고 빈손으로 가는 인생, 뭐 그리 다 거머쥐려고 아등바등하고 사는지, 다 내려놓고 가볍게 가자.
나뭇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밖이 소란스럽다. 구름이 머뭇거리는 하늘 아래, 이름 모를 새가 나무 끝에 앉아 애처롭게 울어댄다. 그 할머니 가슴에 혼곤히 고여 있을 눈물을 본 듯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메운다. 그대로 끝나기엔 아쉽고 사무치는 허무, 허망의 소리 없는 절규가 바람으로 떠돈다. 고작 이 허망을 위해 그리도 제 영육을 들볶으며 피멍들이고 살았을까. 그대 아는가, 하나님이 여호와이신지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진리 안에서 참 자유 함을 얻어,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삶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