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이 말처럼 중요한 말은 없다. 제아무리 좋은 글감이 있더라도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글을 무조건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 글을 마무리 지어 보낼 때까지는 여러 날을 끙끙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글이 쉽게 구상이 되지 않을 때는 나는 며칠이고 성경 말씀을 듣는다. 특별히 계시해준 하나님의 말씀은 신경이 연결되고 핏줄이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며, 통일성 있는 일관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 분석을 하니까 복잡한 두뇌가 뻥 뚫리는 것 같고 머리가 개운하다. 즐겁게 성경을 공부 하다보면, 의외로 쉽게 내가 원하는 소재가 떠오른다.
나는 그동안 글을 쓰면서 만족할만한 한 편의 수필을 쓰지 못하고 시간과 더불어 잊어버린다. 빈약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좋은 글을 쓰기에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 영혼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배워온 진리와 함께 성령의 소통이 이루어지게 되면, 쨍하고 해 뜰 날도 있으리라. 먹구름 속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시간이 지나가야만 청명한 하늘이 나타나듯이, 착잡했던 마음이 밝아지리라. 글을 쓴다는 것은 고삐를 잡고 채찍을 휘두르는 마부와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나는 아직 일관된 가락으로 말을 몰지 못한다. 군더더기가 심하고, 원래 주제에서 이탈되어 영 진도가 안 나간다. 그리고 내용의 맥락이 통하지 않고 반신불수가 되어버린다. 그럴 때는 또 성경을 읽는다던가. 특히 성경구조를 훑어보면서 다시 기름칠이 되어 흘러내리기를 기다린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더 좋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주신다.
지혜와 총명의 신이 나와 함께하시고, 보혜사 성령께서 스승이 되셔서 참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하고, 감성이 문자로 바뀌어, 인간 존재의 의미,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사상을 전달하고 싶을 때도 있고, 마음속에 축적된 인생을 더듬으면 충만한 사색이 넘쳐흐르고 산하를 더듬으면 풍부한 감정이 솟구칠 때도 있다.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막상 상상의 실체를 잡아 글로 옮겨 쓰려고 하면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 하나같이 벽에 부닥친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는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존재로 우둔함을 해소하고, 쾌활한 공기를 심장에 공급한다. 말씀의 기를 받아 생각을 강화시켜주고, 지혜와 용기를 안겨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만족스럽게 이루어졌을 때 삶은 기쁨으로 차지만, 인간의 끝이 없는 욕망은 채워질 리가 없다. 글을 쓰면서 이러한 인간의 내면 문제와 부딪히며 대화를 하고 정감을 느끼며 깨닫게 된다. 풀 한 포기에서도 생의 소중함을 느끼고, 한 점 바람에도 감사하다. 고독할 때나 슬플 때, 그리고 몹시 유쾌하고 즐거울 때도 살아가는 의미를 찾게 되고, 그것을 다시 나름대로 포용할 수 있는 사색의 나래로 펼치게 된다. 나는 오늘도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한없는 동심을 유영한다. 글이란 자기표현이며 수필이란 자기 고백의 문학이기 때문에 진실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동심과 상상으로 채워졌던 먼 날의 추억이 담겨있고, 생활에서 얼룩진 아픔도 있으며, 실수담이나 허점을 담은 정담이 있고, 원망으로 점철된 세월과 미련 속의 만년설처럼 시원하고 달콤한 향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만사, 글 한 편을 쓰는데도 성령의 감동이나 교통하심이 없으면 글이 써지지 않는다.
재능을 타고 난 것도 분명 아니다. 다만 내면의 소리에 귀먹은 척할 수가 없다.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에만 헌신하며 살기에는 나의 본질이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쓰고 또 쓰고 밤을 새우며 구겨버린 원고지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빈 가슴의 바람결에 날아가 버린 것을. 왜 고생의 길을 가려는 것일까. 한 알의 진주를 탄생시키기 위해 아픔을 삭이다가 고독하게 죽어간다는 진주조개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런 진주 같은 글을 써내지도 못하면서 나에게 왜 이 일을 하게 하는 걸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그렇지만 인간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간다. 머릿속에는 무언가 늘 활동하고 있다. 그것이 일정한 형태나 체제가 주어지지 않고, 생명을 갖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고 만다. 그런 나에게 성경을 배우게 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지게 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살게 한 것이 기적이다.
어찌 되었든 글을 쓴다는 것은 혼자 걸어야 하는 외롭고 고독한 길이다. 성령께서만 구원자가 되어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찾고 혼자 터득해서, 헤쳐 나와야 하는 길이다. 물론 꽃 빛 어우러진 향내 그윽한 밀원의 세계는 지혜의 세계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 그 길이 잠 못 이루는 아픔도 있어야 하리라. 한밤중에 원고 뭉치를 들고, 찢고 또 찢으면서, 한 자도 못 쓰고 버리는 아까운 시간도 있어야 할 것이요, 허허한 공허감도 맛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참으로 행복하다.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진리와 함께 얻어진 진실과 깨달음으로 성령의 교통함이 이루어지고, 변함없고 거짓 없는 영원한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하여, 오늘도 힘이 솟고 소망하게 된다. 근심 걱정 염려가 떠날 날이 없는 이 세상에서 견디게 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찬송하게 하시니 참으로 행복하다. 어차피 진리의 깨달음 없이는 영혼이 맑아질 수 없고, 고뇌하지 않곤 좋은 수필을 얻을 수 없다. 순간순간의 삶에 더욱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각고의 작업이라 할지라도, 수필의 연마는 나의 생활과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될 것이요, 그것이 하나의 즐거움으로 꽃 피우기 위해서는 사색하는 생활, 그리고 그 생활을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자기 은사를 실현할 때 가치가 주어진다. 나는 얼마만큼의 수련과정이 있어야 할 것인가.
이름 없는 한 포기 들꽃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들새를 보고도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를 읽는다.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고 그 옛날의 고향의 얼굴을 그리며, 땅 위에 하찮은 벌레를 보고도 살아가는 의미를 터득한다. 수필은 꾸며놓은 거짓이 아니다. 지혜의 은사, 하나님을 깨닫고 성령의 교통이 이루어져서, 되게 하는 대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그래서 성경신학이 역사상 다시없는 보화라고 자랑하고 싶다. 생각이 생각으로 머무르고 말 때는 나의 사상이 될 수 없으며, 악보에 기록된 가사가 노래로 가창 되지 않을 때는 음악이 될 수 없다. 쌀을 씻어 불을 때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