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향한 작은 길
신앙에 대한 갈망이 너무도 절실하여 신을 찾아 방황하던 적이 있었다. 종교 서적이라면 가리지 않고 섭렵하였고, 절집, 교회, 성당 등 발길이 닿는 대로 기웃거렸다. 밤새워 기도도 해보았고, 귀신 접한 점쟁이 말을 듣고 큰 굿까지 하기로 결정을 해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굿을 하기로 정한 날짜를 사흘 앞두고, 지방으로 보급되었던 박용기 목사님의 성경강론 녹음테이프를 듣게 되었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비로소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막아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고뇌해 왔던 내 어리석음이 또 한 꺼풀의 허물을 벗고, 밤낮으로 성경 말씀을 듣고, 녹음 테이프에서 흘러나온 강론 말씀이 너무 좋아서,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기록을 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30여 년이 흘렀다.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지금 같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몰랐던 것이다. 유독 나만 제일 힘들게 산다고 생각했다.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하는데, 병마에 시달리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좋다는 약이라면 까마귀 똥이라도 주우러 나설 참이었다.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에 유혹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다. 웬 교파가 그리 많은지,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누가 더 설득력있느냐에 따라서 종교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나로서는 올바른 진리를 파악하기가 절대 불가능했다. 경험한 것이 다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 달랐다. 마지막에 참 인생이 허무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는 것인가.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돼지우리에 가서 살아본 경험이 없으면, 아버지 집에서 비단이불 덥고 기름진 음식 먹으며 사는 행복을 모른다고 했던가. 이게 상대적 존재의 결함이란다. 하나님만 전능자시다. 고생을 해보아야 형통함의 기쁨도 맛보게 되고, 진리의 말씀으로 깨달아지는 삶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바르게 걷지 못하면서 어설프게 걸어가는 아기 게를 슬프게 바라보는 어미 게의 애달픈 심정이, ‘여호와’를 모르고 살아가는 나를 바라보는 심정이었으리라.
나는 지금 ‘성경적기독교‘ 특강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실황방송을 통해서 진행되어 지난 7월 말에 마지막 강의가 끝났다. 정말 생각할수록 대단하고 놀라운 진리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성경 말씀, 헛되고 정말 유치한 사색이나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거짓 종교가 아닌 하나님이 계시된 성경 말씀, 얼마나 멋있고 슬기로운 말씀인가. 그래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나 자신이 속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남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꼭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 새삼 내 가슴을 친다.
하나님께서 인간 타락으로 인해서 진리를 진리대로 절대 인식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특수한 중생한 이성을 선물로 주셔서, 놀라운 하나님 계시를,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성경을 깨달아 가게 하신다. 그래서 성경신학의 5대 개념, 성경계시란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인간이란 무엇이고, 그리고 역사란 무엇이고, 세계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논리체계를 잡아 진리로 확증시켜 주신다. 아마 모든 지성인들이 알고자 하는 주제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층 더 알고 싶어졌고, 절대 진리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분명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절대적인 존재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신적 계시 성경이 있고, 그 성경에 의해서 하나님이 확실하게 계시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은 하나의 문서이고 인간의 의지로 이 땅 위에 아름다운 유토피아 세계를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하는 지성인들은 지금 혼미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결론도 없고, 근거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서로 힘 대결이다. 그것이 무기대결로 이어지다 보면 그 무기 앞에 인간들이 다 설복당하게 되는 처참한 역사의 종국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왜 오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 가치를 모르게 되면, 인생이 허무하고, 시집와서 자식이나 낳아 주는 것이 나의 존재인가? 이런 마음에서 가치상실이 이루어지게 되면 우울증 환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목표의식이 확고해야 당당해진다. 성경신학을 하게 되면 5대 개념이 정리가 되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그래서 은사 실현을 하게 된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사실을 아는 그 지식이 최고로 고상하다고 했다. 그 이상 높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 엄청난 보화가 담겨있는 진리, 이 진리를, 이 못난 나에게까지 주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 절대 진리로서의 기독교는 상식에 의한 가변적 진리체계의 종교가 아니라, 불변적 진리 체계의 종교임을 재정립하게 되므로 마음에 묵은 때가 벗겨지는 기분이다. 생각의 세척을 하게 되는 것도 이것이 참 종교이고, 절대 진리의 종교라고 하는 데 있다. 시시비비를 따지며 이기와 탐욕으로 찌든 자신은 저만치 비켜두고 세상 탓 상대방 탓으로 돌리며,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면서 한 밤을 지새 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먼데 있는 섬은 먹색이고, 들어가면 꽃 섬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캄캄하다. 빛이 안 보인다. 이런 상태에서 성경신학의 5대 개념이 담겨 있는 ‘성경적 기독교’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참 은혜중의 은혜이요, 축복 중의 축복이다. 깊고 심오한 진리를 터득해 나가므로 숲을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숲으로 난 작은 길,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지껄이며 그냥 지나쳐버린 좁은 길이지만 달고 오묘한 향기가 발길을 사로잡는다.
어느새 어둠을 걷어내고 동녘 하늘은 불그스름한 기운이 돋는다. 나는 보물단지를 끌어안은 충만 된 기쁨으로 인터넷 앞에 앉았다. 숲을 바라보며 얻은 깨달음 하나, 오직 성경이다. 오직 시선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지난날, 성경을 몰라서 안개 속에 묻힌 끝없는 미로, 수시로 막아서는 절벽 앞에서 얼마나 많이 절망하였던가. 그리고 아무런 준비 없이 얼마나 허둥대고 힘들어했던가.
숲으로 향한 작은 길, 그 어느 것 하나도 무심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새삼스레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는 아침 햇살, 오직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사와 눈물 어룽이는 행복감, 하나님 말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평화와 안식을 어디에 비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