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그 끝이 어디인지
그녀가 춤을 춘다, 허공을 향해 기인 명주 수건을 서리서리 흔들어 대며 그녀가 춤을 춘다, 그녀가 뛴다. 모둠발로 뛴다. 하늘을 향해 오르고자, 무엇을 찾고자 함인가, 미친 듯이 뛰어 댄다. 비가 내린다. 장대비가 내린다. 그녀는 흙탕물속에 누웠는데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그녀의 갈망이 붉은 흙탕물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녀가 쓰러진다. 그녀의 소복차림이 선지피로 물들었다. 죽은 듯이 쓰러진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초등학교 동창인 정순이 엄마, 그녀는 무당이었다. 그 시절, 내가 태어난 갯마을에서는 무당굿이 자자했다. 밤새껏 굿을 하는 날이면 사방은 적요 속에 잠겼고, 친구는 한쪽 구석에 무릎을 곧추세워 얼굴을 묻고 앉아 있곤 했다. 무릎 사이에 묻은 얼굴이 어느새 눈물범벅이었다.
“가엾은 친구”
그 끝이 어디인지, 어떤 때는 묘지에, 논두렁 밭두렁이 안방이었다. 눈물겨운 설득으로 내림굿을 하여 신을 받았다. 그리고 정순이는 우리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남색 쾌자에 색 띠를 두르고, 왼손에는 방울을,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휘둘러대는 모습이 너무 괴기스러워 무섬증까지 들었다. 거기다 늘어놓는 사설, 그 또한 구구절절하여 얼마나 사람들의 애간장을 끊어 놓았던가. 굿이 끝난 후, 쪼그리고 작은 육신이 가슴 저리도록 외로워 보였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 처량하고 가련해 보였다. 번번이 고뇌하고 방황했을 그녀의 삶, 하나님께서는 왜 나로 하여금 일찍이 그렇게 처연한 모습을 보게 했을까. 과연 하나님이 어디 계시고, 인간이 왜 사는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제의 답안을 건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알게 된 기독교 진리,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 출발하여 의미 있는 지혜를 깨닫게 된 셈이다. 이 가치는 누구에게나 동등할 리는 없다. 폭우의 피해는 그 폭우가 멎은 뒤에 알 수 있듯이, 성경만이 하나님 말씀이고, 참 기독교,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삼아 주신 것의 감동이 없이, 어찌 섭리하신 여호와의 기이한 뜻을 알 수 있으리. 기독교 신앙인은 분명하게 성경진리를 깨달아 알고 확신하는 신앙이 아니던가. 그런데 현대 기독교 안에 무속적이고, 세속적인 기괴한 행동들, 일어나는 사건들, 불가사의한 현상들, 인본주의적 신앙요소의 독소가 깊이 침식되어, 교회의 심장부를 노리는 현실의 위기를 볼 때면, 지나온 과거의 그림자가 한층 선명해지면서, 그녀의 극에 달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무당의 풍습에 따라. 신에게 정성스럽게, 불행을 면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욕망으로부터, 인간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전하여지는 신비들,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인간의 욕망에 의한 계획이 강조되는 인본주의적 독선에 의한 부패상이 실로 심각한 시대이고,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아주 스릴 있는 시대라고 보면, 성경신학을 간직했다는 것은 정말 대박 중의 대박이다. 그런데 옛적부터 진리가 있는 곳에는 대적들이 많았다. 보통 센 대적들이 아니다. 지금도 현실 눈앞에 버티고 있다. 이에 성령께서 진리로 무장하게 하고, 생활로 무장하게하고, 체제로 무장하게 한다. 싸우게 하려고 무장을 시킨다.
누군가는, 싸움은 인간을 흥분시키는 오락이라 했다. 그만큼 인간들이 사악해졌다는 이야기다. 확대경을 장치해 놓고 그 속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그림을 돌리면서 요지경 속 들여다보듯 신이 난다. 현대기독교는 흡사 세상의 혼탁한 요지경 속과 다를 바 없다. 요원한 거리에서 맴도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짜 성령 충만한 것처럼 미쳐 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신에게 정성스럽게 공을 쌓기만 하면 복을 내려준다는 식이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보았자 입만 아프고, 누구랄 것도 없이 시큰둥한 말투와 반응을 보면, 오늘의 세태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현대 기독교의 문제점을 요지경으로 들여다본다. 결론은 성경이 아니면, 인간의 철학적 사고나 경험에 의하여 만들어진 일반종교와 다름없다. 인간의 넋두리에 불가하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결국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신학을 우습게 여기고, 구렁이가 병아리를 삼키듯, 불량하고 포악한 마음도 야들야들, 슬슬 얄팍한 수작을 쓴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현실인가. 이것이 한심한 인본주의 화 돼가는 기독교 모습이 아닌가. 역사의 바퀴가 물질이라는 축과 함께 맞물려 까맣게 타들어 가는 요지경 속이다.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아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되므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고, 지금도 살아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확증되는 말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는 없다. 잘 발효된 포도주와 같은 깊은 맛을 음미하게 한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해서 성경진리 이외에 복음을 변질시켜버리면 저주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성경은 문서이고, 하나님말씀이 아니고,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고들 한다. 개혁교회가 다시 인본주의로 돌아가는 과정을 말해준다. 이게 교회의 현실 모습이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고 긴박하기도 하다. 정말 요지경 속이다.
신본주의적기독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기본 원리로 한 계시중심 신앙을 지향한다. 올바른 기독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이걸 믿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종교, 바른 기독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영육 간에 받은바 복을 깨닫고, 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기독교의 계시적 신앙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바로 알고 섬기며 믿는 신앙이다. 무속적 신앙, 세속적 신비를 찾아 믿는 종교, 그리고 스스로의 행복을 목적으로 온갖 노력을 서슴지 아니하고, 이성을 중심으로 한 신앙을 지향하는 인본주의적 기독교와는 판이한 차이가 있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생각할 것은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혀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하나님을 아는 힘이다. 성경을 알게 되면 떠오르는 태양이나 달빛, 그리고 별빛들, 이름 모른 들풀들, 피고 지는 들꽃들, 또 기어 다니는 보잘것없는 미물 곤충들, 벌레 하나만 보아도 그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직 감동으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신다고 받아드리게 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속신앙에 묶여, 자유스러울 수 없었던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계시된 성경만이 영원불변의 진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