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전능성 찬양
참 이상하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타락하게 해서 저주해 놓고는 보호해 주실까. 어찌하여 순전하고 정직한 욥을 폭삭 망하게 했다가 흥하게 했을까. 나는 한동안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었다. 더욱이 욥을 사단에게 맡겨 망하게 해 놓고,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시는 섭리는, 일반 상식으로 얼른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경을 읽고 성경강론을 듣고 나면 가슴에 와 닿는 무엇이 있었다. 성경을 대할 때마다 ‘맞구나, 맞아’ 하면서 마음속에서 ‘그래,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인데, 감히 무능한 인간의 시각으로 생각했구나, 하나님 뜻대로 하신거야’ 하는 생각을 차츰 하게 되었다. 사악한 영을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집어넣으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두려움도 앞섰다. 이런 것을 보면 여호와의 전능성을 찬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삶이겠는가.
구약의 욥기서는 악에서 떠난 욥을 망하게 하시고, 작정하신 뜻에 따라 욥을 흥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전능성을 찬양을 주제로 한 내용이다. 바닷가 언덕배기에 절규하는 파도 소리처럼 그렇게 애잔하기만 했던 이스라엘민족의 험난한 역사를 배경으로, 만신창이가 되게 하신 욥의 극적인 생애는, 인간적으로 보면 깜짝깜짝 놀랄 일이지만, 여호와의 전능성을 찬양하게 하고, 하나님 이름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신 섭리가 너무 놀랍다. 말씀의 의미가 부여될 때마다, 나로 하여금 기름 없는 집에서 사는 것처럼 허전하고 추웠던 마음이 눈 녹듯 풀리고, 병색이 가득한 얼굴은 분단장 곱게 한 모습으로 변한다. 이 세상사는 동안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산다는 것은 참 복이다. 그동안 언약자손들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가르치기 위해서 얼마나 모진 시련과 고통을 겪게 했던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해서 타락하고 범죄 해도 아주 버리지 않고 보호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을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의 종살이와 학대 속에서도 전능하신 능력으로 자손이 번창하게 하셨고,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고, 광야 사십 년 동안에도 하나님 능력으로 보호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요단강을 갈라서 건너게 하여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여호와의 전능하심, 이방 민족을 쳐서 승리하게 하고,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며, 밥 먹듯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았던 백성들, 자기들이 좋아서 세우게 된 사울왕의 치적으로,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다윗은 시련을 겪어야 했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을 사울이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사울에게 악신이 들게 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하기까지 그 많은 시련 속에서도, 왕위가 끊어지지 않게 보호하시기를 꺾어진 갈대를 마저 꺾지 아니하시는 것같이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대적을 물리쳐주시고, 다윗왕가를 굳게 세워주신 여호와의 권능,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언약하신 대로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출생하게 했다. 이런 신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 백여 년 가까이 사는 것도, 내 개인의 역사도, 모든 역사가 여호와 손에 달려있음을 공부하면서 여호와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진다는 것은 참 놀라운 행복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한계가 없다. 하나님의 영역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사단도 꼼짝없이 하나님께 붙들린바 종으로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 움직이고 존재한다. 그런 사단에게 하나님은 욥의 소유를 붙이셨고, 생명만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여 욥의 전신을 사단의 손에 맡겨,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임에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는 신앙고백을 욥으로 하게 한다. 문병하러 온 친구들이 욥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일그러진 모습,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면, 죽을 때까지 시련 고통 없이 살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세수하지 않는 얼굴에 분을 바른 꼴이 되게 했다. 그런데 욥더러 죄보다 벌이 너무 경하다고 하는 친구들, 그리고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 다 쓸어가 버리고, 자녀들까지 다 죽고,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 아내의 어리석음을 오히려 책망하며, 욥은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는 욥으로 여호와 이름이 마땅히 찬송을 받을 분이라고 찬송하게 한다. 이게 여호와의 전능성 찬양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의 얄팍한 기교나 날렵한 수사로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서해바다 돌풍처럼 악마 소리를 질러대며 달려드는 욥의 시련은, 묵묵히 죽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이스라엘 언약백성의 축소판이 분명함을 깨닫게 한다. 모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아 모친의 유방을 빨아 살게 된 것에 대한 욥의 탄식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상케 한다. 악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을 여호와로 인정하기까지의 고난과 시련은 너무도 값진 찬송이 되게 한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그만큼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 까닭 없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에 따라, 흥건하게 젖는 찬란한 슬픔 안고 사단에게 맡겨졌음의 의미를 모르게 되면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 스스로의 전능하심의 능력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섭리 앞에 누가 감히 무슨 말을 하리요,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준다고 하며, 어리석고 미련한 자가 멸망을 당한다고 지껄이는 욥의 친구들은. 사색의 결과들을 총동원하여 욥으로 불결한 죄인임을 인정하도록 설득시키려는 그들에게 잘못된 신관을 가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이 가능케 한다. 불택자에게는 죄에 대한 보응으로 형벌을 내려 영원히 멸망하도록 섭리함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택자에게는 인과응보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쯤은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욥은 친구들의 잘못된 신앙을 반박하고 여호와께 기도를 드린다. 오늘따라 욥의 기도가 내 가슴을 친다. 잠자리에 누워 평안을 얻으려 해도 왜 일일이 간섭하셔서 놀라게 하시고 두렵게 하시며, 뼈만 남은 몸으로 왜 살게 하느냐고 묻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놓아주어야 죽을 수 있다면서, 자기 몸을 흙을 뭉치듯 해서 생명을 넣어준 피조물임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욥은 귀로 듣던 주를 눈으로 본다며 깨닫게 하신 전능자 여호와를 노래한다. 이 같은 애원은 여호와의 전능성 찬양이 아니고 무엇인가. 갑절의 복을 주심에 감사하며, 욥은 나이 늙어 정해 주신 수명의 기한 대로 살다가 갔다, 무소불능하신 여호와를 높이 찬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