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대한 진정성
복음 중의 복음, 기독교진리의 중추적인 뼈대라 할 수 있는 로마서가 주는 놀라운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청나지만, 일단 성령께서 사도바울로 로마서를 기록하게 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바울은 자기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라고 자신과 복음은 떨어질 수 없는 연결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말씀으로, 바울이 사도로 택정된 요인이 바로 복음임을 밝혀주고 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사용하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 속에는 정말 커다란 감동이 숨어 있는 말씀이다.
율법의 충성자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싫어하고 핍박했던 바울을,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부르심은 하나님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구별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전파해야 할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이라”(롬 1:2) 바울은 자신을 부른 복음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 의해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으로 진정한 것임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언약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 역사적 사실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게 하려고 부름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복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쁜 소식으로 바울은 복음이라 묘사하고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이 기쁜 소식을 듣게만 되면 누가 들어도 기쁘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부르러 온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만 된다면 더더욱 기쁘고, 이 복음은 들으면 들을수록 듣고 싶은 것이 복음이다.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는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짜 복음을 듣지 못하고 평안함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의로운 척 의기양양하여 우쭐대던 죄인 바울을 깨닫게 하고 의롭다고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했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 바울은 이미 복음을 위하여 살도록 예비 된 자로 긍휼을 베풀어, 성령께서 이끄는 데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온 삶을 도처에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그 예수를 직접 만나 본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신약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자로 신약성경이 완성될 때까지 메시아권이 부여된 사도가 되게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핍박하는 자였고 예수를 죽이는 데 동참했던 자였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이 놀라운 칭의의 복음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를 기록하게 했다는 것이 더더욱 놀랄 일이다. 로마에 가서 공부할 만큼 유학파였던 바울은 동서양의 철학을 다 섭렵한 석학으로, 허리를 굽힐 줄 모르고 당당했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부터는 오직 절대 진리인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가 가치로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하는 복음을 위하여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몽땅 다 드린 자이다. 말하자면 그의 인생은 죽음의 초월이요 삶의 초월이며 현실의 초월이었다. 사도바울의 신앙이야말로 너무도 경건하고 엄숙해서 바울의 글을 대할 때마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나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륜 따라 일평생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만사가 하나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짐을 부정할 수 없게 했다. 성령께서는 사도바울로 부활 승천하신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복음에 대한 개요를 통해 증거 하게 한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며, 영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사실을 증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 바울, 그는 유대인 중 베냐민 지파였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고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율법에 정통한 자요, 대 율법학자였던 그가 율법을 완전히 말살시켜버리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는, 갈릴리호수 언덕을 거니시던 예수, 나사렛 마을에서 아버지를 닮아 목수 일을 하시던 예수, 베들레헴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말 구이에 뉘었던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너무도 다르다. 성령께서는 유대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해서 부활 승천하신 이가 그리스도인 줄을 믿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사실상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구약성경에 메시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틀림없이 온다고 했기 때문에, 로마의 강한 통치 아래서 짓눌려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아는 오지 않고 살아갈 힘이 없었던 그들은 한 가닥 소망인 참 선지자, 참 왕, 참 제사장인 메시아를 갈망했다. 그런데 웬걸, 그들 앞에 나사렛 촌가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예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급기야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 버릴 수밖에, 바울도 거기에 동참한 자였다.
그러나 어떻게 하리, 예수님이 죽으신 다음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 그 후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혈기 등등하여 가다가 노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야 바울은 깨닫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몰라서 예수를 믿는 자까지라도 핍박했던 자신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얼마나 가슴 찡하고 놀라운 말인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문제에 관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볼 때는 쓰레기 같은, 용납받을 수 없는, 천대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수였던 자기에게 이 엄청난 사도의 직분을 준 이유가, 성령께서 바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하므로, 이 놀라운 하나님은혜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기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진실하고 참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예수가 누구인지 바르게 모르면 그에 대한 충성은 물론이고 담대함이 나올 수 없다. 사도바울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로마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던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발견하고 새롭게 태어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며 즐겨 사용했던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 된 지체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사도바울이 전하는 편지를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게 하고 살아계신 여호와 계시의 말씀을 따라 살며 기동하게 하는 은혜에 한없는 감사를 드리며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