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얻기를 소망하며
마음은 기둥뿌리이다. 마음이 굉장히 깊다는 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말씀을 먹지 않고 배고프면 마음이 흔들리기 일쑤이다. 세상일만 바라보면 머리가 혼탁해지고, 말씀을 듣게 되면 평온해진다. 영의 작용이 활발해져서 영기와 총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영혼이 거듭나고 중생한 자라면 ‘여호와 계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진리, 이 성경을 배우지 않고는 심기가 평안하고 견고해지는 법이 없다. 성경공부를 안 하면서 지혜 얻기를 원하는 것은 밥 안 먹고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하지 않았는가.
나이를 먹어가지고 왜 저렇게 욕심을 일으킬까. 참 어리석다 하지만 육이 영보다 강하면 욕심이 앞선다. 육신 상태에서는 활기차게, 정력적으로 굴하지 아니하고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육체 부분이다. 솔로몬이 나이 많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안 해본 것 없이, 이 땅 위에서 마음껏 평화를 누리면서 먹고 즐기며 자기의 영화를 위해서 살았던 것이 헛되고 헛되며 다 헛된 것이더라.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만이 참된 것이고, 그의 뜻을 깨닫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 이상 복된 것이 없더라. 여호와께서 솔로몬으로 그 얼마나 인생의 문제를 깊이 터득하게 했는가. 이걸 깨닫는 것이 욕심이 버려지는 방법이고 원리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영적 속사람을 붙들어 주어야 흔들리지 않고 평안하다. 내 속에서 육체가 원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원하는 것은 육체를 거스른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바라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 마음 하나를 놓고 육에 속하면 이 땅에서 지옥 생활이고, 영에 속하면 천국 생활을 하게 된다. 솔직히 내 마음 내가 못 다스린다. 어찌하든 총명이 전만 못해도 성경 말씀을 듣고 읽어야 마음에 평안이 오고 더 이상 중요한 게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강관리도 중요하지만 마음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좋은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스트레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보약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심기를 상하게 되면 마음의 환자가 되기 일쑤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자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손자가 건강이 안 좋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면 상심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상심이 된다.
인간이란 것, 아니 살아간다는 것, 자기의 뜻에 만족스럽게 안겨지지 않을 때 자잘한 걱정과 근심으로 남는다. 인간의 끝이 없는 욕망은 만족스럽게 채워질 리가 없다. 그러나 내 뜻대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주셨으니, 교회의 일원으로서 삶의 여정이 결코 헛된 시간만은 아니라고 자긍하게 된다. 몇 년 전, 교회 체제개혁을 시작한 시점에서, 당시 성경신학연구소 박용기 소장님을 통해서 들었던 강의 내용을 상기해 본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기(氣)란 무엇인가?’라는 강의에 앞서, 지상의 교회는 완벽할 수 없지만 지혜자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서 견고하고 튼튼하다고 했다. 이는 지혜자로서 위치탈락이 되면, 먼저는 나 자신이 망가지고, 교회가 망가지고 더 나아가 세계가 망가진다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 성경을 꼭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기가 떨어지고 힘이 빠지고, 정신이 흐려진다고들 하는데, 그 말은 정기가 약하다는 말이다. 정신 기능이 흐려져 버리면 의지 기능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의 부분에서 나타난 영기, 총기와 혼의 작용에서는 정기(정신의 기운)와 지기(뜻과 의지), 그리고 마음의 심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제해결은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밖에 없고, 쌀을 씻어 불을 땔 때 밥이 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진리를 깨닫게 할 때 영의 소욕이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므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요한삼서 1:2) 했고, 이는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서 인간을 지었기 때문에 그 생명의 기운을 공급받아야 만이 영과 혼이 잘될 뿐만 아니라 모든 육신도 강건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영의 소욕에서 나오는 욕망은 기쁨과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지만, 육의 소욕 안에 감각에서 나온 욕망은 차면 찰수록 마음이 편치 않다. 먼저 입맛부터 없어지고, 잠도 오지 않는다. 그러나 심기가 평안할 때는 아들이 좀 잘못해도 섭섭한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말씀을 상고하며 지혜 얻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살게 되는 도구로서의 나를 생각하게 된다.
생명의 기운을 공급받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호와 계시’ 성경 말씀을 상고하는 일이다. 영기(영의 기운)가 높아져야 총기(총명한 기운)가 좋아지고, 총기가 좋아지면 정기(정신의 기운)가 있으니까 정신력이 흐려지지 아니하고 똑바로 내 자리를 지키는 지기(뜻과 의지)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기가 작용하니까 마음의 흔들림이 없게 되고, 속이 상하거나 혈기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라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 마음이 성령의 소욕에 속해 있는가, 육신의 소욕에 속해 있는가. 항상 그게 문제이다.
영을 강화시켜서 영의 소욕으로 육체의 소욕을 죽여 버리게 되면 구체적으로 심기(心氣)가 흔들리지 않으니까, 육신 상태인 혈기(血氣)와 활기(活氣)가 부정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기운이 늘 공급되면 성령의 열매로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그러나 육의 작용에 의해 산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과 똑같이 살게 된다.
이 세상은 지속적으로 기쁨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목적은 하나님나라이다. 거듭나고 중생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런즉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고 하는 바울의 확신 신앙이 나로 감동케 한다. 정말 값지고 귀한 말씀, 영원토록 자랑하고 싶은 성경신학,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귀한 진리가 아닌가. 칠판에 그려진 ‘타락에서 구원까지의 도표’는 물론이고, 성경을 읽다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면 성경강론(박용기 저)을 펼쳐놓고, 반복해서 사전처럼 읽고 확인하며 공부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해 본다. 보혜사 성령이 가르쳐 깨닫게 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