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을 맞이하여
해마다 맞는 십이월이지만 십이월에 서면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만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신다는 걸 믿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든든하게 살아가게 하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 내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고 묵상에 잠긴다. 내게 언제 어두운 시간이 있었던가. 내게 언제 슬픔의 날이 있었던가. 가는 세월이 아쉽다며 애먼 손톱 물어뜯는 조급함이 언제 사라졌을까.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목 놓아 추위에 떨고 있을 이 밤, 나는 책상 의자에 두 발을 모두고 앉아, 기쁨, 슬픔, 소망, 그리고 내 인생 여정을 거울에 비추이듯 훤히 알고 계실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고 있다. 그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면 물먹는 솜처럼 무겁기만 하던 육신은 거뜬해지고 고단함도 사라진다. 전에 여호와께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고 때리셨지만 싸매주셨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믿어지게 하여 소망을 잃지 않게 해주셔서, 위로와 보호 속에서 말씀의 능력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다. 오묘한 인생의 이치를 깊고 깊은 여호와 계시 말씀으로 터득해가게 하므로 조금씩 철이 들게 하고, 말씀으로 힘을 얻어 신앙인으로서의 자리매김이 확고해지게 하므로, 삶에 있어서 의미 없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명상하면서, 그 지고한 섭리 앞에 지난 시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즐거움보다는 괴로운 일이, 기쁜 일보다는 시름이 더 많았던 지난날, 용케도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성경은 “여호와 계시”라고 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하여 너무도 분명하게 확증하여 주는 성경신학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실한 생활이나마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발자취가 자녀들에게 신앙의 향기로 번져갔으면 하는 생각으로,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며 반성하고 다짐하게 했다. 때로는 내 주제를 깜박 잊고,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했지만, 여호와께서 내 마음대로 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시련과 아픔을 겪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나로 경험하게 한바, 문득문득 자녀들의 신앙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앞선다. 그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게 하려면 먼저 성경을 배우게 해야 할 텐데, 듣든지 말든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오늘은 어떻게 살았나? 불평하지 않았나? 감사하고 살았는가?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성경을 모르면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는 바울의 말이 자꾸 생각이 나면서, 성경 강론을 함께 듣고 배워서 소통되어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살고 싶은 애타는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아직 아닌지, 들을 자가 아닌지, 금년도 벌써 12월, 크리스마스도 코앞에 기다리고, 이 생각 저 생각 묵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된다는 것은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바른 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그게 하나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믿게 함이 인간의 지혜와 말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생명의 말씀(성경신학), 성경의 원 저자인 성령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논리적인 체계에 의하여 밝혀주는 값진 보화, 측량할 수 없는 값이 담긴 성경의 깊은 뜻을 풀어 가르쳐주는 성경 강론을 어찌 나만 혼자 들어야 하는가. 자녀들을 생각하면 어미로서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을 토막지식으로 얻는 것으로, 뜻은 몰라도 무조건 많이 읽는 것으로 만족할 것은 아닌데, 그러나 모든 범사를 다 총괄하시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불리한 일은 절대 안 하실 것이고, 더 좋게 하려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자위도 해본다. 그나저나 여호와께서 저들로 성탄을 기뻐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성탄은 알고 보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쁨이 아닌데, 하나님의 백성들로는 무한한 기쁨이지만, 예수가 그리스도로 믿어지지 않는 자들, 하나님 없다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마지막 심판주가 되심을 어찌 알랴.
성경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알겠는가. 예수의 탄생은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고,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여호와께서 베들레헴 구유에서 태어날 것을 구약 미가서에서 예언하게 한 것이 그대로 성취된 역사적 사실로, 성탄·예수의 탄생은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확증으로,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곧 하나님이시라(요1:1). 예수는 선지직 왕직 제사장직을 한 몸에 지니고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음을 저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구약을 살펴보면,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을 잊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여호와 이름을 두시는 성막을 만들게 해서, 그 언약궤 안에 여호와의 이름을 넣어두고, 계속 그 언약궤를 중심으로 광야 길을 걸어가게 했다. 이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죄와 사망의 몸에서 종노릇 하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말미암아 구속해 주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리지 않고 경외케 하려고 성경을 배우게 하지 않는가.
풍성한 이 진리, 여호와께서 나로 하여금 성경신학으로 공부하게 해서 깨닫게 하는 이 진리가 너무 좋은데, 나이 칠십이 넘은 어미의 말을 안 듣고 안 배울망정, 어미는 주고 싶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데 이걸 어쩌나. 연말이 되어 찾아오는 자녀들과 가정교회로 모여 한 해를 반성하고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온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놓고, 아들, 손자, 손녀, 며느리 딸 사위 둘러 앉혀놓고 함께 먹고 즐기며 성경을 읽고, 그 옆에 성경강론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만약을 위해서 나는 더 열심히 성경을 공부해야겠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가르쳤나를 기억해 본다. 사랑하기 때문에 애굽에서 사백 년을 종살이하게 했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방황하게 했고, 사사시대에는 이삼백 년을 여호와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하고, 시험을 당하게 하고, 그리고 범죄를 하게 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육 방법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오랜 기간을 걸쳐서 끝까지 참으며 가르쳤지 않는가. 그렇다. 조급할 것 없다. 여호와께서 가르칠 것이니까. 그때가 언제일지. 조용한 시간, 언제든지 저들에게 속히 지혜와 명철함이 있게 되기를 묵도할 수밖에. 12월을 맞이하여, 나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고,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여호와만 찬양하며 살아왔는가? 조용히 묵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