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본질
성경적인 행복의 본질에 대한 견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복을 성도로 하여금 누리게 하는 천국 생활을 말한다. 성도는 영원한 천국 생활은 물론이지만 땅 위에 머무는 동안에도 부분적으로 천국 생활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행복은 인간의 의지력에 의한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박용기 저 기독교 행복론 p37)
위의 인용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과는 근본적으로 차별화된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막연히 행복을 추구해가니까 많은 문제점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도서를 읽어보면, 솔로몬도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서 즐겁게 하는 방법을 굉장히 많이 연구했다. 사업을 크게 확장해 보고 집을 크게 지어보았다. 그리고 포도원도 가꾸어보고, 각종 과목도 심었으며, 보배를 쌓고 부자가 되다 보니까 그다음에는 노래하는 남녀와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다. 솔로몬은 모든 자보다 뛰어났고 지혜도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눈이 원하는 것,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기뻐했다. 그런데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유익함이 없더라는 것이다.(전도서 2장 3~11절 참조) 누구나 하나님을 잊게 되면 욕구를 채우면 채운대로, 못 채우면 못 채운대로 늘 불만에 허덕인다. 자기 본능대로 솔로몬이 한 그대로 똑같이 추구해가지 않는가. 그런데 다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고, 해 아래서 무익하고, 아무 유익이 없는 그게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 행복의 본질을 알아보려면 복을 아는 게 순서일 것 같다. 행복과 복은 분명 다르다. 행복은 복을 누리는 상태,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복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 번성, 정복, 통치하라는 삼대언약(창 1:28)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결과가 되는 하나님나라, 영원한 천국을 약속한 것이다. 결국 천국 자체가 신령한 복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실제로 이 땅 위에서 경험하고, 현재 상태에서도 성도가 누리는 성경적인 복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행복의 견해와는 그 뜻을 전혀 달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행복은 지상적인 것에 다 몰두해 있다. 심신의 욕구가 조금도 부족한 감이 없는 상태라고도 하고, 사전에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그러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되어 있다. 일찍이 솔로몬은 자기 심신의 욕구를 다 취해보고, 마음과 생각이 원하는 바를 다 해보고 아무 유익함이 없다고 밝힌 것이 성경인데, 일반적인 행복이 얼마나 허구적인가. 그러나 기독교적인 행복은 천상적이면서도, 영원한 것이면서도, 현실에서도 부분적으로 가능하다. 지상에서는 완전한 행복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한다. 행복이란 성경에서 분명히 약속한 복으로, 자손이 더 번창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정복할 것이 없고, 더 다스릴 것이 없기 때문에 행복하고 만족한 곳,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했던 실체적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어지는 곳이 천국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처럼 들었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므로 정돈된 생각 세계에서 무한한 삶의 힘이 분출되게 한다.
기독교 신앙인은 천국을 약속받은 자들이고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 지상에서도 지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자기가 이루는 줄로 착각을 하니까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행복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복을 받아 누리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복하게 해야 행복한 것이지, 내가 억지로 행복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은 행복하고, 행복한 사람은 성공했다고들 한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도 무한 경쟁이다. 하나를 성취하면 또 다음 과제가 주어지고, 안 그러면 밀려날까 두렵고, 일의 성취로만 행복을 가늠하다 보면 상실감이 커지고 불행하다. 성공한 것 같지만 행복은 남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행복은 인간 편에서 행복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힘쓰고 애쓰는 가운데서 얻으려는 행복이고, 기독교적 행복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복을 받아 누리게 허락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땅으로 이끌어 들어간 것은 행복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가나안땅은 천국에 대한 그림자이다. 실체가 아니다. 외형적인 풍요로움과 넉넉함은 모두가 하나님나라, 천국의 모형과 그림자로, 결국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아직 하나님나라에 도착은 안 했지만 하나님 말씀을 배우게 하고 깨닫게 하므로 무한한 천국의 행복을 이 땅에서 심령으로 누리게 된다. 벌써 두뇌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때 평안이 오는 것이고, 그 평안은 감사를 낳게 되고, 감사는 사랑의 실현을 촉발시킨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행복 된 삶의 과정이고 행복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적 행복을 분명히 바르게 알아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두뇌에서 다 씻어 내버려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육체의 평안이 필요 없는가? 그게 아니다. 심령의 평안이 전제된 육체의 평안은 참 중요하다. 육체와 심령이 따로 분리될 수 없다. 심령이 평안해져야 육체가 쇠고랑을 차고 굶주려도 여전히 평안이 유지된다는 말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자기는 실상 외부적으로 볼 때 가장 약자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한다는 것을 알고 믿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에게는 실망이 있을 수 없다. 과거에는 학벌, 문벌로도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큼 실력자고 능력이 있었던 자였는데,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로부터 과거에 그 모든 것을 무가치로 여기고 분토처럼, 만물의 찌꺼기처럼 완전히 버려버리게 했다. 따라서 남 보기에는 참 불행한 자 같지만 본인은 무한한 행복을 누리는 자며 행복한 자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자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게 하지 않았는가.
기독교가 말하는 행복의 본질은 심령의 평안에서부터 출발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고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나 역시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이 진짜 선물로 주어졌음이 두뇌에서 분명히 믿어지게 할 때 행복에 젖어들게 된다. 어느 봄날, 아무도 없는 꽃 핀 동산을 애인과 단둘이서 산책하는 기분이랄까. 일찍이 솔로몬은 은을 사랑하는 자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부한 것을 욕구하는 자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고 했다. 인간의 노력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유토피아 세계가 가능하다면 천국이 필요 없고, 구원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확고히 다지고, 나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며, 하나님 앞에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고 싶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