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목사님에게
목사님!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너무 세월이 많이 지나서요. 기도원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리며 공부했던 ‘꼬마 부흥사’ 아시죠. 그게 바로 저랍니다. 뒤늦게나마 꼭 말씀을 드려야 제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요. 얼마 전까지도 부끄러운 과거라서 모두 마음에 담고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갈려고 했으니까요. 목사님은 서울의 명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셨는데도 다시 저와 함께 신학을 하셨잖아요. 그때 많은 무례함이 있었지요. 워낙 박식하시며 겸손하고 너그러우셔서 전혀 느끼지 못하셨을 수도 있을 거예요. 저를 가르쳐주기도 하시고 고민할 때는 상담역도 감당해 주셨잖아요. 고마운 분으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답니다.
1959년 5월, 실습 기간으로 기억돼요. 전국 순회 전도를 나가게 되었지요. 목사님은 저와 같은 조에 편성되어 강원도 쪽으로 파송을 받았거든요. 기도원 원장이신 교장 선생님이 조원들의 임무를 부여해 주셨잖아요. 하필이면 저를 주 강사로 지명하셨죠. 즉시 사양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답니다. 목사님은 집회 때, 사회를 담당하는 보조 강사로 지명하셨고요. 다른 전도사님은 찬송 인도자로 지명하셨고요. 한편 무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바람에 깜빡 실수했다고 생각했답니다. 목사님! 이제 기억나시죠? 목사님은 당연히 받아들이는 눈치였어요. 제가 편하게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한 달 동안 순회전도가 끝날 때까지 어쩔 줄을 모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이런 경우를 어른들이 바늘방석이라고 표현하더군요. 특히 강원도 어느 읍 소재지에 있는 큰 감리교회에서 첫 번째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죠. 벌써 그 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우리가 도착하자 목사님과 장로님, 권찰님 등이 환대해 주셨잖아요. 어느 여자 권찰님 댁에 여장을 풀고 집회 준비를 했지요. 집회 시간이 임박하자 예비종이 울리고, 성도들은 교회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지요. 조금 후에 집회가 시작되었잖아요. 놀랄 만큼 많은 성도가 넓은 교회당 안에 입추의 여지 없이 모였었죠. 교장 선생님이 지명해 주신 대로 목사님은 강단 뒤쪽에 놓인 등받이 낮은 의자에 앉으시고, 저는 중앙에 있는 등받이 높은 의자에 앉게 되었어요. 저는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미안한 생각을 했답니다.
목사님은 강대상 앞으로 나가셔서 찬송을 점점 속도가 빠르게 부르고 나서 통성기도를 시키셨잖아요. 학교에서 보고 배운 대로 답습한 거죠. 저도 목사님의 사회에 이어 강단에 서서 마이크를 입에 가까이 대고 ‘여러분 제일 앞자리가 금 자리입니다. 금식하며 회개하면 심령에 쌓인 죄 덩어리가 성령의 불로 다 타버립니다. 이틀만 지나면 죄 덩어리 타는 냄새가 온 실내에 진동하게 됩니다. 믿습니까?’ 온 성도들이 ‘아멘’ 하고 화답하자, ‘모든 죄를 낱낱이 자복하며 회개하십시오. 이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라고 크게 외친 후에, ‘주여! 주여! 주여!~ 불길 같은 성령의 은혜가 충만케 하옵소서. 주여! 주시옵소서.’라고 반복하여 크게 외치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책 받침대를 잡고 부르르 떨면서 강대상을 사정없이 두드렸죠. 장내는 이른바 성령의 불이 붙기 시작했거든요. 벌써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설교 후에는 ‘주여! 주여!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아~앙! 어떻게 해요. 주여! 어떻게 해요.’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교회당 안을 가득 메웠거든요. 목사님과 저는 물론 성도들도 겉옷이 땀으로 젖을 정도였으니까요.
첫날 밤 ‘심령대부흥회’는 매우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잖아요. 놀란 것은 숙소가 갑자기 바뀐 거였어요. 목사님과 전도사님은 제외하고 저만 단독 방을 주었잖아요. 자리에 누워 많은 생각이 잠을 설치게 하더군요. 우선 목사님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을 했고요. 나는 아직 죄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을까? 여러 해 수련을 쌓아서일까? ‘수련’이란 정신적으로나 학문 및 기술을 닦는 것인데! ‘부흥’이란 인간의 감정적인 흥을 고조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수련회’나 ‘부흥회’는 성령의 역사와는 무관하다는 말인가? 연마된 기술이나 분위기 조성에 의한 감흥을 돋우는 기술이 아닌가? 정말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기술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답니다.
지난 학창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더군요, 여러 의혹이 생기다가도 그럴 리가 없겠지! 나 스스로 자위해보기도 하지만, 마음의 의혹을 씻을 수가 없었답니다. 실습 기간을 마치고 기도원에 돌아가 연례행사인 ‘심령대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죠. 온갖 의혹을 품고 관악대 좌석에 앉아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여전히 고조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거든요. 행여나 의혹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을 기대여서였죠. ‘수련회’ 분위기는 전과 여일하게 요지경을 이루는 이른바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상태였어요. 기대했던 의혹에 대한 문제의 해답은 감감해지기만 하더라고요. ‘수련회’가 끝 날 무렵이었어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눈여겨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마지막 날 저녁 시간에 드디어 확답을 얻게 되었어요.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연마된 기술에 의한 착시나 환각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제가 기도원에 오기 전, 시골 교회에서 처음 ‘부흥회’에 참석하여 엄청난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때 강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시던 태도나 방법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잊어버리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목사님과 함께 큰 감리교회에서 이른바 ‘부흥회’를 인도할 때 그대로 답습한 거예요. 결과는 성공적이었잖아요. 무엇이나 오래 연마하면 대가가 되는 것은 당연하죠. 기술은 여건만 맞으면 반드시 효력이 나타나지요. ‘부흥회’는 참가자의 상태와 여건, 인도자의 연마된 기술이 절대로 필요하거든요. 목사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목사님도 아시듯이 오순절 다락방에는 강사도, 강대상도, 관악대도, 춤추며 찬송을 인도하는 자도 없었잖아요. 그런데도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임했거든요. 그렇잖아요. 목사님!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나 봐요.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목사님! 아쉽지만 남은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 하기로 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2021년, 꼬마 부흥사 동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