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장님께
과장님! 평안히 주무시나요? 저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꼬마 학생’이에요. 오래전 하나님 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을 얼마 후에 전해 들었어요. 알았으면 빈소를 찾아 영정 앞에서 과장님의 옛 모습을 기리며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몰라요. 과장님과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사연이 많았잖아요. 미망인이 되신 사모님과 밤을 새우며 지난 이야기로 위로를 했을지도 모르고요. 과장님은 교회에서 장로님으로, 학교에서는 학생과장님으로 근무하셨죠. 학생들의 생활, 실습, 훈육, 징계 등을 도맡아 활동하셨고요. 혹시 외부에서 불량청소년들이 침입했다가도 과장님만 나타나시면 씻은 듯이 줄행랑을 치고 했었으니까요. 과장님은 카리스마가 대단하셨잖아요.
어느 날 사모님께서 제 작업실에 오셨더라고요. 그림 그리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참 솜씨도 좋지, 머리도 좋고, 똑똑하고, 내 사위라도 삼고 싶어.’라고 하는 순간 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어안이 벙벙했어요. 사모님은 무심한 표정으로 ‘어서 그려.’라고 하시며 가셨거든요. 과장님도 같은 생각을 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있겠어요. 한 학년 후배인 과장님의 참한 따님이 바로 제 마음에 음욕을 품게 한 장본인이거든요. 따님이 멀리서 나타나면 머리를 숙이고 피해 다녔으니까요. 저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철부지였지요. 죄에 대한 고민과 갈등, 그리고 두려움으로 철들 겨를이 없었나 봐요. 아마 신학교를 졸업하면 사위 삼아 목회를 시키려고 하신 것으로 짐작했어요. 과장님은 전국교회 목사님들과 인맥이 두터웠잖아요. 사모님이 일단 제 마음을 흔들어 놓으신 거죠.
졸업식 몇 주 전이었죠. 날씨가 좀 싸늘한 저녁 무렵에 과장님께서 신학교 졸업예정자들을 특별히 소집하셨거든요. 주님의 고난을 몸소 체험하는 실습을 하기 위해서였죠. 기도회 시간에 누가복음 23장 26절에서 28절까지 읽으셨어요.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며 뒤따르는 여인들에게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라고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주셨죠. 졸업하면 평탄한 길보다는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이 기다린다며 몸소 체험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라고 하셨으니 눈물이 날 때까지 통성으로 기도하라고 하셨거든요. 학생들의 통성기도는 한동안 뜨거운 열기 속에 계속되었고요.
밤이 깊어지자 과장님은 학생들을 인솔해서 체험학습장소로 가셨어요. 모두 신발을 벗고 맨발로 출발했거든요. 험준한 산 계곡을 따라가다가 가시덩굴을 헤치며 능선을 오르기도 하고 비탈길을 내려가기도 했잖아요. 여기서도 ‘주여!’ 저기서도 ‘주여!’ 앞에서도, 뒤에서도 ‘주여!’ 소리가 연발했지요. 한참 가다가 갑자기 뒤에서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라고 찬송을 부르자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죠. 누구의 명령도 없이 학생들이 합창하며 발바닥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갈길을 걷다가 드디어 더 가지 못하고 자갈밭 위에 주저앉아 눈물바다를 이루었거든요. 분위기가 한창 고조된 상태에서 갑자기 통곡 소리와 함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잖아요.
처음 접해본 새로운 경험이어서 숙소에 돌아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인간의 감성이 더는 표출될 수 없다고 느꼈거든요. 이것이 흥분을 다시 일으킨다는 이른바 부흥회(復興會)라는 말인가! 또는 기술을 갈고 닦는다는 이른바 수련회(修鍊會)라는 말인가! 방법이나 기술을 닦고 연마하는 것이 아닌 원리라면 어떤 이론적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단순한 감성적 현상을 느끼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라면 이성적으로 수납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몇 년 동안 철저히 속았다는 말인가! 너무 고민과 갈등이 극에 달하자 정말 괴로운 나머지 ‘설마 그럴 수는 없겠지!’라고 자위도 해보았답니다.
당시 한국교회 전체가 ‘부흥회’나 ‘수련회’로 잠식당하는 실정이었으니까요. 정말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고함을 치며 강대상을 두드리는 것도, 죄가 성령의 불로 타버린다는 것도, 성령의 은혜가 안개 같다는 것도, 죄가 다 타버린 증거가 향기라는 것도, 관악대의 ‘밴드’ 소리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도, 맨발로 험한 길을 걷는 체험학습도 방법과 기술임에는 분명하지 않은가! 온갖 의혹들은 밤이 깊어갈수록 끊일 줄을 몰랐답니다. 누웠다가 일어나 성경을 보고 다시 누워 의혹에 잠기다가 한밤을 지새웠지요. 의욕이 사라지고 맥이 풀린 상태로 며칠을 지냈어요.
드디어 1960년 4월에 졸업식을 끝내고 잠행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조용한 계곡을 찾아 울며 기도하다가 성경을 보는 것이 일상이었거든요. 살아갈 방법도,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도 모두 상실해버렸기 때문이었어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살아야 하나! 마음에 떠오르는 기미도 느낄 수가 없을 만큼 허탈감에 빠졌으니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밖에는 없었어요.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마침 갈라디아서 2장 16절 이하에 시선이 집중되며 마음에 뜨거움을 느끼게 되었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에 ‘아멘 할렐루야!’ 환희에 벅찬 눈물이 쏟아지며 찬송이 터져 나왔어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눈을 뜨거나 감아도 눈물이 쏟아져 내렸어요.
과장님! 5년 동안 기도원에서 보낸 학창 생활의 최종 결론이었답니다. 마음껏 울고 마음껏 찬송을 불러야 하기에 이른 아침부터 한적한 계곡을 찾아야만 했어요. 가장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죠.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내가 사는 방법이나 이유와 목적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답니다. 모든 착각이나 착시 또는 환각 상태는 성경을 모르는 데서 발생한 부작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당연히 서로 속이게 되고 속을 수밖에 없잖아요. 이것이 지금 성경 교사가 되게 된 가장 큰 동기랍니다. 과장님! 화나셨나요. ‘고약한 녀석, 제 놈이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꼭 그러실 것만 같아 죄송해요. 지금 저는 자만에 빠져 드리는 말씀이 절대 아니에요. 나를 내세우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다음 주님 앞에서 뵙는 날에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때까지 편히 주무세요.
2021년, 울보 꼬마 학생 드림